프롤로그
2019년 겨울, 내 마음속엔 작은 균열이 생겼다.
직장은 안정적이었다. 출퇴근길도 익숙했고, 불만을 터뜨릴 만큼 힘든 환경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매일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을 너무 나쁘게 대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질문이 시작이었다.
퇴사를 꿈처럼 떠드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에겐 농담이 아니었다.
‘지금이 아니면 30년 뒤 후회할까?’
그 생각이 스치자, 갈망은 결심으로 바뀌었다.
세계일주.
내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를 꿈이었다.
물론 쉽지 않았다. 퇴사를 사장님께 말하던 날, 붙잡는 손길을 뿌리치고도 마음은 흔들렸다.
부모님께는 아직 차마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세상은 내 편인 듯 보였다.
창밖을 보니 ‘여행의 힘을 믿으세요’라고 적힌 버스 광고가 지나갔다.
우연히 만난 친구는 세계를 떠돈 여행자의 긴 글을 내게 건네며 “꼭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온 우주가 떠나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그러던 차에 세상은 코로나라는 벽을 세웠다.
모든 계획이 무너졌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출발할 거라는 확신만 남았다.
그리고 또 다른 이별이 찾아왔다.
2021년 설, 아버지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셨다.
아직도 그 부재가 믿기지 않는다. 장례식 내내 눈물을 참으며 손등을 꼬집던 기억.
“내가 세계일주를 다녀와서 이야기 들려드릴게요”라던 다짐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그 후로 여행은 단순한 꿈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바치는 약속이 되었다.
몸을 만들고, 체력을 다지고,
필요한 준비들을 하나하나 채워갔다.
예방접종, 마라톤 참가, 다이빙 자격증.
짐은 점점 가벼워졌지만, 마음은 점점 단단해졌다.
마지막까지 불안은 있었다.
100% 준비되지 못한 채로 떠나는 게 아닐까?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여행은 원래 완벽히 준비된 순간에 떠나는 게 아니라, 결심한 순간 이미 시작되는 것이라는 걸.
이 이야기는 내가 실제로 걸었던 517일간의 기록이자, 때로는 픽션처럼 느껴질지도 모를 한 편의 여행담이다.
현실과 상상, 기록과 서사가 뒤섞인 이 길 위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누구를 만나, 어떻게 변했을까?
어떤 것이 픽션이고 어떤 건지 현실인지는 독자가 판단할 것이다.
픽션이 사실이 될 수도 사실이 픽션이 될 수도 있는 나의 여행일지.
누구나 마음속에 품지만,
누구나 떠나지는 못하는 그 길.
나는 마침내 첫 발을 내딛는다.
무대의 막이 오르기 전, 배우는 늘 깊은 숨을 들이쉰다.
내게 세계일주란 그와 같았다.
커튼 뒤에서 관객을 마주하기 전의 긴장, 설렘, 두려움이 내 안에서 뒤섞여 있었다.
나는 이제 곧, “세계여행”이라는 가장 크고 낯선 무대 위에 설 참이었다.
그 무대 위에는 대본이 없다.
내가 발 딛는 길 위의 모든 만남과 사건, 우연과 선택이 곧 즉흥극이 된다.
이제, 막이 오른다.
제1막 ― 베트남. 그 첫 장면은 하노이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