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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송목 Jun 12. 2022

와이프의 와이프가 된 남자

와이프의 와이프로 살기

나는 지금까지  '와이프의 남자'로 살아왔다.

'남편'이라는 으로

'가장'이라는 책임으로

'아빠'라는 본능 계승자로.

<드로잉#140 = 최송목>

우리 집은 철저한 분업의 전형적 가정 공장이다. 

내가 돈을 벌어오면 와이프는 돈을 쓰는 구조다. 집안일은 전업 주부 와이프 몫이고, 돈 버는 일은 전업 돈벌이 용역업자인 나의 몫이다. 우리 가정은 업무분장 잘되어진 전업자들의 공동체다.


 그러다 어쩌다 돈벌이 전업자의 변화로 가정 조직 업무분장에 조정이 생겼다. 업장 위치도, 하는 일도 많이 달라졌다. 와이프는 집 밖으로, 나는 집안으로 서로 임무 교대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와이프가 하던 일을 떠맡게 되었다. 전직 돈벌이 전문업자가 어쩌다 와이프의 와이프가 된 연유다.


주 업무는 설거지다.

특히 큰 냄비, 그을음 많거나 난도 높은 설거지는 전적으로 내게 맡겨진다. 이 세상에 그 일은 나 말고는 아무도 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맡겨진다. 밥하고 먹는 것과 치우는 설거지는 노동의 양으로는 비슷하지만, 심리적 질적인 면에서 체감도는 확연히 다르다. 재료 다듬고, 칼로 썰고, 씻고, 쌀 안치는 과정은 일종의 창작과정이다. 그 창작은 '맛있는'상상과 '밥 먹을'희망을 내포하고 있는 재밌는 놀이 같은 것이다.


그러나 설거지는 한마디로 뒤치다꺼리다. 지저분한 비주얼과 냄새와 물 튀김을 동반한다. 특히, 식후 포만감과 나른함을 자제하면서 앞치마를 두르고 널브러진 그릇을 씻고 가지런히 정리하는 과정은 꽤 귀찮고 상당한 희생적 이성을 필요로 한다. 한마디로 썩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기꺼이 하는 것처럼 해야만 되는 일이다. 


청소는 어떤가? 청소도 설거지와 같은 맥락으로 재미없는 일이다. 역으로, 뭘 설치하고 장식하고 어지럽히는 일만치 재미있는 일도 없다. 누군가가 따라다니면서 치워주거나 뒤치다꺼리해 주면 더욱더 재미있어진다. 어린아이들이 던지고 칠하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누구나 하기 싫은 일인데, 필요한 타이밍에 알아서 척척 바로바로 움직여 주는 거만치 고마운 일도 없다. 역설적으로 이것이 설거지를 포함해서 내가 자진해서 집안일 도와주기에 적극적으로 나선 주이유다.


또 다른 이유는 어차피 달리 할 일도 없거니와 딱히 와이프를 기쁘게 해 줄 다른 방도가 마땅찮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돈 버는 용병으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노병이 되어 서비스업으로 전환해야 할 때라는 걸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남들이 싫어하는 일을 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걸 나도 알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기분이 어떠냐고?

운명적으로 맞이한 와이프라는 이름의 남자로 사는 새로운 일상이 즐겁다. 스스로 생각해도 의외다. 새로운 세계에 입문하게 된 호기심과 다른 기능을 요구하는 다른 세상에 대한 적응이 새롭다. 세계적인 우주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박사는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76세로 사망하는 그날까지 훌륭한 업적을 이루어냈고 낙천적으로 자유롭게 살다 갔다. “인생이 재미없다면 그것은 비극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재미있게 생각하면 재미있다. 그래! 재미있게 살자. 처음에는 떠밀려서 시작했지만, 하다 보니 익숙해지고 하다 보니 생전 처음 해보는 일로 칭찬도 듣고 가족 팬들도 생겼다. 가끔은 귀찮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가족들 특히 와이프 표정에서 묻어나는 고마움을 보는 것 또한 큰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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