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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송목 Dec 08. 2022

당신의 '존경' 안녕하십니까?

관심 있는 단어 36

우리는 살면서 많은 존경을 남발한다. 처음부터 그리된 건 아니다. 뭔가를  하려면 목표로 삼을 기준이 필요하고 그러다 보니 과하게 표출된 것이다. 좀 더 배우고 나아지려고 모델로 삼고자 시작했던 존경이 권위와 우상에 매몰되고 경도되어 추종으로 변질되어가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목표가 아니라 그가 원하는 욕망대로 흘러간다. '나'가 소멸되거나 흡수되는 존경의 부작용이다. 이것은 무지몽매한 이들에게만 생기는 일이 아니다. 학식 많은 엘리트들도 한 번 빠져들면 헤어나지 못하는 굴레다. 고대 왕권시대, 근대 독재시대에도 있었고, 평등, 자유를 부르짖는 지금도 '존경'은 형태만 달리할 뿐 여전히 건재하다. 그것은 감성, 이성, 철학, 이데올로기, 관습, 인간관계 등과 버물려져 누구나 쉽게 걸려들고 한번 걸리면 빠져나오기 힘든 올무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존경은 삶의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표징이다. 누군가를 존경하지 않으면 외롭고 허전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삶의 의존이고 기준점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따라 하거나 존경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삶의 현상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존경할 것인가? 이미 죽은 자를 선택할 것인가 지금 눈앞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 자를 택할 것인가?


먼저, 살아있는 누군가를 존경하는 일은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그 느낌을 바로 전달받을 수 있는 체감의 편의성과 즉효성 때문에 쌍방 간 효과적이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내용물이 바뀔 수 있는 가변성이 있고, 그의 일부를 존경했는데 전체의 존경으로 강요받거나 몰입화하는 확장성이 매우 강하여 위험한 선택이기도 하다. 또 많은 경우 권력자가 충성의 도구로 활용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부하가 보스를 움직이는 출세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런 실용적인 존경이 역겨워 벗어나고파 선택하는 것이 바로 사자(死者)를 존경하는 일이다. 논란 없고 변동성 없는 안전한 자 즉,  죽은 자(死者)를 존경하기로 마음먹는 것이다. 죽음으로 박제된 존경은 현실적 영향력은 떨어지지만, 우리를 지배하려 들지도 않고 이끌려고 강제하지도 않는다. 내가 마음대로 가졌다가 언제든지 버려도 되고 다른 이로 교체해도 말이 없다. 가장 큰 장점은 확고한 고착성이다. 모델이 움직이지 않고 늘 그 자리 그 정체성을 유지한다. 살아 움직이는 인간은 그게 어렵다. 그들은 존경에 집착한다. 그래서 잘못된 존경, 존경의 변질, 존경의 강제로 일생을 노예로 살아가거나, 그 굴레를 벗어나고자 존경을 철회했다가 그 부작용으로 파멸하기도 한다.

 

 존경이 깊어져 숭배, 추앙, 추종이 된 경우도 있다. 지난 TV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 주인공 염미정(김지원)의 “나를 추앙해요”라는 대사가 유행이 된 적 있다. 존경과 사랑이 결합하여 ‘무조건적 사랑’으로 확장 강조된 개념이다. 개인 간의 사랑과 추앙, 추종, 맹종, 헌신은 구분하기도 애매하고 그 자체로는 사회적 문젯거리가 아니다. 사랑이 메마른 시대에 지고지순의 멜로물 소재로 오히려 사이다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심리가 사회화 또는 전염 확산되면 부작용이 발생한다. 극성 연예인 팬클럽, 편향된 정치인 추종, 사이비 종교지도자를 맹종하는 열혈 신도가 그것이다. 탁지원 국제 종교문제 연구소장에 따르면, 한국에서 자신을 하느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만 20여 명, 재림예수를 자처하는 이도 50명이 넘는다고 한다. 자신을 신이라 주장하는 자들도 우습지만, 그걸 믿고 따르고 있는 자들도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존경은 자칫 깨어있지 않으면, 생각의 종속으로 노예화나 집단최면의 세계로 빠져드는 가스 라이팅의 단초가 될 수 있다. 특히 인간이 같은 인간을 존경할 때에는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부작용이 따른다. 특히 살아있는 대상을 존경할 때는 위험하다. 그래서 이를 잘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높임말 정도’로 상대를 세워주면서 고의적으로 오용함으로써 출세의 도구로 삼기도 한다. 하지만 일부는 이를 곧이곧대로 진짜 존경으로 착각하다가 망상에서 허우적댄다. ‘배신당했다’,‘의리가 없다’ 등의 말이 나오는 이유다. 존경은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있을 수 있는 단어다.


우리의 일상은 존경으로 도배되어 있지만, 진정한 존경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법원에서, 각종 정치 연설에서 그렇다. 칼날을 숨기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될 뿐이다. 예컨대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존경하는 판사님, 존경하는 의원님, 장관님...’등이다. 하지만, 우리들 중 아무도 그 존경을 ‘온전한’ 존경으로 인식하는 이는 없다. 그냥 전치사나 수식어일 뿐이다. 차라리 ‘존중합니다’로 현실적 언어로 고쳐 말하는 게 좀 더 솔직하고 가식을 줄이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경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봐야 할 것이다. 상대의 무엇을 존경하는가? 그의 타이틀 직위 권력인가 인품인가? 그의 어떤 점을 존경하는가? 지금 당신이 존경하는 그 대목이 그 사람으로부터 소멸되어도 존경을 계속할 것인가? 그 존경에 흠집이 생겨도 남들이 모두 비웃어도 그 존경을 그대로 유지할 자신이 있는가? 혹 미확인된 존경, 감상적 존경은 아닌가? 이데올로기나 잘못된 의식이 작용한 점은 없는가? 남들 따라 하는 우상화나 군중심리의 무작정 맹종은 아닌가? 등이다. 당신의 그 존경을 설명하기 위해 최소한의 이유를 문장으로 서술할 수 있어야 좀 더 진실한 존경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히든싱어 15년 경력의 어느 모창가수가 고민을 말했다. 모창의 목소리를 벗어나고 싶다고, 자기 목소리를 내고 싶다고, 본 가수의 흉내에 흠뻑 빠져 자기 목소리를 잃어가고 있는 게 싫어졌다고 했다. 한때 존경과 우상화는 우리의 공동 번영과 화합의 본보기로서 질서를 유지하는 훌륭한 버팀목이었고, 한편으로 각 개인의 정체성과 창조성을 억지 말살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이제 우리는 남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기에는 너무 성장한 어른이 되어 버렸다.


이제 그 유아적 존경을 거두어들일 때가 된 것이다. 『내 인생 구하기』에서 개리 비숍은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당신도 삶이 그냥 표류하게 내버려 두었다. 하나의 드라마에서 다른 드라마로 두서없이 흘러가는 동안 당신은 제대로 개입해본 적도 없었다."라고 했다. 그동안 관성에 의해 남의 것처럼 살아온 당신의 삶을 더는 표류하게 할 수 없다. 이제는 표류를 끝내고 직접 노를 저을 때다. ‘닥치고‘ 존경을 끝내고 당신의 노래를 불러라. 그래야 이 지겨운 추종의 시대가 막을 내릴 것이다. 그래야 독립 헌법기관이라고 주어진 자존심조차도 지키지 못하고 이○○계, 윤○○계 등 보스 따라다니는 유아 정치인들, 눈 감은 채 윗전 이끄는 대로만 따라 걷는 영혼 없는 아바타 권력자들이 사라질 것이다.


<참조>

1. 나는 전략적으로 살 것이다, 최송목, 유노 북스, 2021 

https://naver.me/IMpnZoPT

2.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34012.html

http://www.dailycnc.com/news/articleView.html?idxno=215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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