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之行,避高而趨下(수지행, 피고이추하)
사람들은 대개 과거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를 산다. 가난했던 시절의 불안을 지우기 위해 평생 돈에 집착하는 사람, 한때 받은 상처 때문에 특정 직업을 선택하거나 자녀의 진로까지 대신 설계하는 부모가 그렇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임자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숙청과 개혁이 반복되는 정치도 같은 맥락이다. 현재라는 시간이 종종 과거의 연장선 위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는 힘이 되기도 한다. 결핍은 목표를 만들고, 상처는 현재의 어려움을 견디게 하는 에너지가 된다. 많은 성공의 신화 밑바탕에는 힘든 과거와 극복의 서사가 있다. 그러나 과거가 지나치게 확대되면 부작용도 생긴다. 현재는 온통 과거의 그림자에 갇히고, 미래는 과거의 테두리 안을 맴돌다가 수명을 다한다. 과거는 잠시 살펴볼 지점이지, 오래 머무를 장소가 아니다.
우리 사회는 과거 청산에 익숙하다. 일제 청산, 독재 청산, 적폐 청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대물림된 숙제를 반복해 왔다. 그런데 청산은 결코 ‘지워버리는 행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보복으로 변질되면 역사는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정치·제도·문화가 과거의 정리에만 매몰되면, 그 사회는 창조적 에너지를 잃고 미래 비전을 점점 흐려간다. 10년 전만 해도 존재감이 미미했던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자리가 지금은 가장 인기 있는 자리로 꼽히는 이유도, 국가의 에너지가 미래 설계보다 ‘과거 판단’에 더 기울고 있다는 방증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과거를 외면하자는 뜻은 아니다. 과거는 현재의 뿌리이자 미래의 이정표다. 다만, 그 과거를 청산의 대상으로만 바라볼 것인지, 교훈의 자원으로 삼을 것인지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진정한 청산은 잘못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 속에서 배움을 추출해 미래로 이어가는 과정이다. 과거를 무작정 덮어버리면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고, 반대로 과거에만 머물면 현재가 제자리에서 맴돈다. 기억하고 고치되, 집착하지 않는 청산이 필요하다.
이러한 자세는 손자병법 《허실편》의 핵심과도 맥을 같이한다. “水之行,避高而趨下(수지행, 피고이추하).” 물은 높은 곳을 피해 낮은 곳, 새로운 방향을 찾아 흐른다. 이처럼 우리 또한 과거라는 '고정된 높은 지점'에 갇혀 안주하지 않고 낮은 곳 즉, 미래를 향해 나아갈 때 비로소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성장을 이룰 수 있다.
한편, 과거에만 집착하는 것도 낭비지만 미래에 대한 지나친 집착 또한 위험하다. 흔히 희망은 좋은 것이라 말하지만, 때로는 희망이 현재를 침식시키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내 집 마련을 위해 10년, 20년 뒤를 바라보며 현재를 극단적으로 절약과 희생으로 도배하는 삶, 혹은 조직이 ‘미래 성장’이라는 명분 아래 현재 구성원의 번아웃을 외면하는 모습이 그렇다. 미래라는 이름으로 현재를 고문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영어의 present가 ‘현재’이면서 동시에 ‘선물’이라는 뜻을 갖는 건 의미심장하다. ‘언젠가 행복해질 날’을 위해 오늘의 확실한 삶을 버리는 선택이 과연 올바른가.
결국 필요한 것은 정리가 아니라 화해와 균형이다. 정리는 과거를 지워내려는 시도지만, 화해는 그 과거를 다른 의미로 품는 일이다. 과거 상처를 부정하지 않고 새로운 관점으로 재해석할 때, 우리는 비로소 과거·현재·미래의 균형점을 찾게 된다.
경영도 다르지 않다. 과거 성과와 실패에만 매달리는 조직은 미래의 기회를 놓치기 쉽다. 유적 발굴하듯 과거의 흔적만 더듬다 보면 달항아리는 찾을 수 있겠지만, 정작 달로 향하는 로켓은 쏘아 올리지 못한다. 분석은 중요하지만, 분석이 목적이 되는 순간 미래는 멈춘다.
이제 기업들은 지난 한 해를 정리하고 내년의 목표와 비전을 세우는 계절을 맞고 있다. 과거는 거울이고, 현재는 선물이며, 미래는 열어야 할 희망이다. 기업도 개인도 과거의 거울 앞에서 “매무새를 고치되 그 자리에 머물지 말고” 미래라는 달을 향해 로켓을 점화해야 한다.
과거를 들추는 데 머무르면 유물은 남지만 미래는 열리지 않는다. 이제는 발굴의 삽을 내려놓고 발사 버튼으로 손을 뻗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것이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진짜 균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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