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民之耳目(일민지이목), 民旣專一(민기전일)
29일 0시, 청와대에 봉황기가 다시 게양됐다. 봉황기는 대한민국 대통령, 즉 국가수반의 소재를 알리는 상징이다. 하지만, 상징 깃발을 올리고 근무 공간을 옮긴다고 권력의 실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깃발은 말없이 묻고 있다. 지금 권력은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
봉황은 실재하지 않는 동물이다. 용과 마찬가지로 상상의 존재다. 그럼에도 봉황과 용은 현실 세계 곳곳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산과 절, 학교와 아파트, 기업 이름에까지 등장한다. 이처럼 실제 동물보다 허구의 동물이 더 오래 기억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허구에는 물리적 한계가 없고, 인간은 그 상징 위에 자신이 바라는 질서와 기준의 최대치를 투사해 왔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손자병법의 한 문장이 떠오른다. 손자는 말했다. “병자, 궤도야(兵者, 詭道也).” 흔히 이를 ‘전쟁은 속임수’로 직역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궤’는 단순한 기만이나 거짓을 꾸미는 기술을 뜻하지 않는다. 힘의 노출을 최소화한 채 상대가 현실을 오인·과잉해석·주저하도록 만드는 인식의 틀 자체를 바꾸는 ‘인식 구조의 설계(道)’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봉황기라는 상징물은 직접적 권력의 물리력 행사 이전에, 국민의 시선과 판단 기준을 한데 묶어내는 고도의 전략적 장치인 셈이다.
손자병법에서는 이를 두고 ‘一民之耳目(일민지이목)’이라 설명했다. 사람들의 귀와 눈을 하나로 만든다는 뜻이다. 이는 생각을 통제하거나 압박하라는 말이 아니다. 무엇을 신호로 받아들이고, 무엇을 기준으로 해석할지를 공유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어지는 ‘民旣專一(민기전일)’의 단계에 이르면 깃발은 설명이 아닌 신호가 되고, 구성원의 행동은 자연스럽게 한 방향으로 정렬된다.
이런 맥락에서 봉황기는 하나의 메타포라 할 수 있다. 봉황기는 권력을 장식하거나 과시하는 표식이 아니라, 권력이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를 설명 없이 전달하는 좌표다. 말이나 선언보다 먼저 인식되는 신호로서, 권력의 위치와 정당성을 동시에 가늠하게 만든다. 대통령의 발언과 결정, 침묵과 행보까지도 이 좌표를 기준으로 해석되며, 그 의미와 무게가 달라진다.
이러한 권력의 속성은 국가라는 거대 담론에만 머물지 않는다. 기업의 로고나 제복, 직함 역시 본질적으로는 같은 맥락의 변주다. 이들은 단순한 표식이 아니라, 조직이 무엇을 기준으로 움직이는지를 공유하는 상징적 부속물이다. 상징이 선명한 조직일수록 불필요한 지시는 줄어들고 자율적 질서가 자리 잡지만, 기준점이 흐릿한 조직일수록 그 빈자리를 촘촘한 규정과 감시가 대신하게 된다.
다만 상징은 언제나 안전한 기준점일 수는 없다. 좌표는 방향을 제시하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판단은 멈춘다. 상징에 대한 과도한 신뢰는 자율적 사고를 대체하고, 기준은 곧 교리로 굳어지기 쉽다. 손자가 고정된 ‘형(形)’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궤’는 인식을 설계하는 방편이지, 숭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봉황은 허구다. 그러나 그 허구가 가리키는 좌표만큼은 실제적이어야 한다. 청와대에 다시 오른 봉황기가 단지 권력의 귀환을 알리는 표식이 아니라, 권력이 지금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되묻게 하는 성찰의 기준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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