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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송목 Feb 21. 2022

우리 엄마 vs 나의 엄마

비슷 다른 궁금한 단어 s


우리는 오 형제다. 그러고 보니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한창 유행했던 애니메이션 이름도 ‘독수리 오 형제’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많아 보이지만, 그 시절로는 특별한 건 아니었다. 우리 나이 때(1960년대)는 주변이 다 그랬다. 경제여건도 좋지 않았지만, 얼마나 키우기 어려웠으면 국가가 “많이 낳아 고생 말고, 적게 낳아 잘 키우자”,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산아제한을 했을까 말이다. 한두 명 자녀가 오히려 특별하던 시절이었다.   


'우리 엄마'는 그 시절 우리 오 형제를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요즈음은 ‘육아’라는 말이 자연스럽지만 그때만 해도 육아(育兒) 즉 '아이를 키우는 ‘개념이 희박했다. 아이들은 ’그냥‘ 컸다. 스스로 놀고 스스로 학교 다니고 스스로 공부했다. 주체의식이 강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저절로 커가는 사실상 방치였다. 끼니 때우고 옷 입히고 등록금 내는 게 아이 돌보는 것보다 더 큰 관심사였고 실제로 그랬다. 그러다 보니 ’ 스스로 컸다 ‘는 게 정확한 표현이 될 것 같다. 엄마의 역할이 없었다는 게 아니라 그럴 여건이 되지 못했던 게 그때 당시의 실상이었다.  


 그 시절 엄마는 항상 ‘우리 엄마’였다. 

우리 오 형제자매 공동의 엄마였다. 오 형제 각각의 엄마가 되어주기에는 엄마가 너무 힘들고 바쁘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들 입에도 ‘우리 엄마’였고 귀에도 익었다. 우리 오 형제들 입히고, 먹이고, 학교 보내고, 졸업시켰다. 적어도 내 기억으로 결혼 전까지는 늘 ‘우리 엄마’로 존재해 온 것 같다. 우리 형제들의 공동 지주 ‘우리 엄마’로 말이다.   

<#23>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 엄마’가 ‘나의 엄마’로 다가왔다. 오 형제는 어느덧 성장하여 대구, 부산, 수원, 서울로 뿔뿔이 흩어졌고, 엄마도 아들딸 집 전전하다 우여곡절 끝에 구십 대 노인이 되어 요양원으로 들어가셨다. 처음에는 오 형제가 같이 우르르 함께 면회 가고 같이 밥 먹고 하다가 언제부터인가 북적거리던 형제끼리 모임도 차차 뜸해지고 엄마 면회도 점차 잦아들었다. 각자 면회 가고 각자 엄마와 연락했다. ‘우리 엄마’가 ‘나의 엄마’로 바뀐 것이다. 특별한 계기나 이유라기보다는 엄마를 향한 각자의 장소와 여건과 시간과 환경이 그리 만든 것이다.     


그러는 동안 나머지 네 동생에 대한 나의 생각도 많이 달라졌다. 그동안 ‘우리 엄마’ 만나러 갈 때, 설, 추석, 제사 명절 때 같이 모일 때 동생 중 누군가 한 명이 빠지거나 엄마에게 소홀히 하면 서운한 감정이 있었다. ‘우리’라는 테두리를 벗어나는 동생이 서운하고 미웠다.

<좀 젊게 가볍게 그려봤습니다> 

그런 시간이 좀 지나고 감정이 이성을 이기면서 점차 우리 엄마가 나의 엄마로 자리 잡아가면서 조금씩 생각이 달라졌다. 다른 형제들이 한 달에 한 번 오든, 일 년에 한 번 오든, 그들은 ‘그의 엄마’를 만나고 나는 '나의 엄마'를 만나러 가게 된 것이다. 나는 내가 '엄마'로부터 받았던 사랑을 '나의 엄마'에게 인수 분해해서 되돌려 드리는데 주력하고 동생들은 그들 나름의 사랑 부채 탕감에 주력하였다. 각자 나름대로 부채의식이 다르고 생각의 무게도 다르고 그래서 행동도 빈도도 달라졌다. 


<#185>

그런데, 우리 오 형제를 전국 각지로 서울로 흩어놓으시고 요양원에서 홀로 면회객을 맞이하고  계시는 당신의 상념 속에 우리 오 형제는 각기 어떻게 자리 잡고 있을까? 아마도 당신에게는 ‘우리 엄마’와 각자의 '자기 엄마’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있는지조차도 모를 것이다. 


그것은 그냥 우리가 그어놓은 치기 어린 경계선일 뿐이다. 당신의 머릿속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선이다. 당신에겐 그냥 오 형제자매의 엄마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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