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칸방에 살아본 적이 있는가. ‘내 어릴 때는 한방에서 식구들이 오글오글 모여 살았지.’ 이런 추억담은 가끔 듣는다. 벽에 붙은 선반 위에 더께더께 올린 살림살이가 있고 그 아래서 먹고 자고 다투며 지냈다는 눈으로 그려지는 장면도 귀에 얹어준다. 상 하나로 밥 먹을 때 밥상 공부할 때 공부상 술 마실 때 술상이 되었음은 뻔하다.
지인이 서울에 내내 있다가 집으로 내려왔다길래 만났다. 아들딸이 서울에서 직장 다니고 남편도 사업으로 서울을 자주 오간다. 그러는 와중에 자식 둘 다 병원을 들락거릴 일이 있어 원룸 얻어 사는 아들 집에 머물게 되었단다. 엄마가 올라오니 다른 원룸에 사는 딸도 보따리를 싸서 옮겨왔다. 석 달을 식구 넷이 원룸에 살았다니, 듣는 내가 괜스레 갑갑해졌다. 영어로 원룸이니 우리 말로 단칸방이다.
지방에 있는 그의 아파트는 방이 네 개다. 제법 비싼 아파트로 그중 가장 큰 평수이기도 하다. 부부만 살기에는 큰 집이다. 화장실이 두 개여서 안방 화장실은 남편이 거실 화장실은 아내 전용으로 쓴다. 이리 넓은 공간을 놔두고 단칸방 생활을 백일 가까이했다니 기가 막힌다.
‘없던 정도 생기더라.’며 지인은 달큰한 웃음을 비친다. 없던 정은 아닐 것이다. 있던 정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니 ‘즐거운 우리 집’ 형상이 되살아났을 테지. 일찍이 서울로 대학 간 자식들이라 스물쯤 객지 생활을 시작했다. 둥지를 떠난 자식들은 가끔 집에 내려온다. 내려오는 횟수가 점차 줄어든다. 서울에서 밥벌이까지 하며 친구도 사귀다 보니 자연히 물리적 거리는 천릿길로 느껴진다. 한번 내려왔다 가라는 부모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다들 그리 살아가는 게 현실이다.
식구가 다 모일 때는 명절이나 특별한 기념일이 아니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기에 석 달 단칸방 생활은 얼마나 남달랐을까. 식구라 할지라도 어른 넷이 한방에서 생활하는 풍경은 아무래도 생경하다. 부대끼며 먹고 자고 아침이면 같이 일어나지만 함께 할 게 이것뿐이랴. 틈만 나면 스마트폰만 어루만지던 사람들이 한방에 앉아 서로를 마주한다. 모녀가 찰싹 붙어 한 이불을 덮는다. 옆 사람 등을 치고 어깨를 부딪치며 웃는다. 시시껄렁한 농담이 오가도 그저 재밌다. 화면 속에서 본 개그보다 청량감을 준다.
원룸이 넓어봤자 원룸이다. 애당초 네 명을 위한 설계는 아니지 않은가. 방이 넷이던 아파트에서는 각자 방에 들어갔는데 여기는 문 열고 들어갈 데라고는 화장실뿐이다. 화장실이 하나이니 누가 들어가면 셋은 대기해야 한다. 사람은 상황이 닥치면 다 해낸다고 했듯 기꺼이 네 사람이 적응의 동물로 거듭난다.
부모보다 키가 더 자란 자식 둘은 엄마가 곁에 있으니 신이 났다. 살곰살곰 아이로 돌아간다. 엄마에게 먹고 싶은 것을 출근길에 주문한다. 어둑어둑한 밤길에 창문으로 불빛이 쏟아지고 아침에 신청한 음식이 냄새를 풍기며 계단까지 마중 나온다. 발걸음이 달뜬다. 앞치마를 두른 엄마가 맞아준다. 어린 시절 하굣길처럼 퇴근길이 이보다 좋을 수 없다.
결혼 전까지 살던 작은 우리 집은 내 것은 없고 우리 것밖에 없었다. 내 옷이 아니라 우리 옷이었고 내 방이 아니라 우리 방이었다. 방 셋에 식구가 일곱이니 내 방이 있을 턱이 없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답게 오 남매 중 유독 내 방 갖기에 집착하던 동생이 베란다에 방을 만들어 독립했다. 추운 것으로 따지면 바깥보다 손톱만큼 나았을까. 좁디좁은 베란다를 제 방으로 만들어 친구까지 초대해 놀았다. 누가 보면 제 자식 아니니 내친 것이라 오해하기 딱 좋은 진풍경이었다.
동생의 단칸방은 ‘있어야 할 건 다 있고요, 없을 건 없다.’는 화개장터였다. 어디서 구하는지 살림살이가 늘어갔다. 말만 하면 어디서든 물건이 튀어나왔다. 방이 생긴 동생이 부럽기도 했다. 이가 딱딱 붙게 살을 에는 추위도 열대야가 득실대는 찜통더위도 동생의 단칸방을 허물지 못했다. 내 방이라는 공간이 주는 심리적 포만감은 절대적이었다.
더 과거로 들어가면 손바닥만 해도 좋으니 내 방을 소원하던 어린 나를 만난다. 학교 갔다 돌아와서 아무도 없으면 마냥 좋기만 했다. 식구 없는 빈집에 가면 기운이 빠진다는 친구가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친구네는 우리처럼 인구밀도가 높지 않을 게 뻔하다. 아주 드물게 혼자 집을 다 차지하고 있으면 집은 그야말로 나의 쪼끄만 우주가 되어 주었다.
날마다 나쁘진 않겠지만 혼자 사는 단칸방 생활은 만만찮은 일투성이겠다. 자기가 들어가야 사람의 체온이 생긴다. 어둠을 삼킬 빛도 내가 스위치를 올려야 비로소 밝아진다. 라면 끓인 냄새와 엄마가 차린 집밥 냄새는 비교 자체가 체급이 다른 겨루기다. 지인의 단칸방 생활은 석 달이기 망정이지 더 길어졌으면 ‘있던 정도 떨어지겠더라’로 바뀌었을까. 어쩌다 뭉쳐서 살았던 단칸방 생활은 인생을 통틀어 다시 없을 별미였겠다. 특별해서 가끔 먹으니 별미라 하지 않나. 날마다 냉면이나 과메기를 먹는다면 질리고 물리겠지. 석 달이 마지노선인지도 모를 일이다.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던 친정아버지의 말씀에 백번 공감한다.
제주도 한 달 살기가 유행처럼 번졌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테지만 몸과 마음을 재충전했으니 다시 발걸음에 힘이 들어간달까. 지인이 단칸방 살기로 얻은 것은 끈끈한 가족애이지 싶다. 오랫동안 충전기에 꽂혔으니 배터리는 백 프로 빵빵하게 불이 들어왔겠다. 기회 되면 우리 식구도 뭉뚱그려 지내봤으면 한다.
지금은 일인 일방으로 산다. 각자 공간에서 문을 닫으니 시나브로 관계가 헐거워진다. 자기만의 방에 있어야 진정한 쉼을 얻는다며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다는 노래가 나왔을 테지. 불편하고 어색하고 짜증스러운 일이 있을지라도 오글오글 콩나물시루처럼 담겨있고 싶다. 시루 안에서 충전만 잘하면 남은 몇십 년은 재충전‘빨’로 굴러가지 않을까.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볼 일이다.
선수필 봄호ㅡ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