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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어줄 낭독자를 찾습니다

일인 연극 -수필

by 보리

‘소설을 읽어줄 낭독자를 찾습니다.’ 지역카페에 올라온 게시글 제목이다. 무슨 소설인지도 모른 채 삽시간에 여러 사람이 지원자로 나섰다. 고만고만한 사람끼리 키재기해서 승산이 없을 듯싶었다. 일당백의 기세로 수필 한 편을 낭독해 게시글 개인 채팅방에 올렸다. 예상은 적중했다. 낭독이 맘에 든다며 나를 고용했다. 계약이 체결되어 기뻤지만 내가 낭독할 이청준의 ‘이어도’는 내 취향과 멀어도 너무 먼 남자 이야기에 섬이 배경인 소설이었다. 1974년 작품이라 현재의 문체와 적잖게 거리감이 있었다. 자연스레 가독성이 떨어져 독자로서도 스며드는데 무리가 있어 보였다. 첫 단락을 읽었을 뿐인데 후회가 보지도 않은 이어도의 높은 파랑으로 밀려왔다. 중편소설이니 분량은 어찌나 긴지 괜히 설레발 쳐서 큰코다치는 건 아닌지 걱정이었다.


1일 차 낭독 파일을 카톡으로 보냈다. 분량도 많고 읽기가 만만한 문장들이 아니라고 솔직히 고백했다. 다시 임금 협상하자고 운을 뗀 것이 아닌데 성큼 웃돈을 얹어준단다. 그 사람은 자신이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같다고 했다. 혼자 책 읽기가 어려워 낭독을 들으면 집중이 잘 될까 시도해 본다면서 똑같은 종이책도 샀단다. 나름의 연유를 들은 데다 금전적으로 파격적인 대접을 받는 이어도를 어찌 소홀히 할 수 있을까. 열과 성을 다해 낭독을 해보리라 새로이 마음을 다잡았다.


e-book을 훑어보니 다른 소설들이 꽤 있었다. 의뢰인은 어릴 때부터 섬 이야기를 좋아해 무작정 이어도란 제목에 끌려 뽑은 터라 첫날 듣고 여느 소설로 갈아탈지 모른다고 기대했다. 이번엔 예상이 빗나갔다. 이제 막 재밌어지려는데 끝나더라며 도리어 아쉬워하는 게 아닌가. 편안히 읽어 듣기 좋은데 틀리게 읽은 단어들이 좀 보인다고 그것만 지켜주면 좋겠다는 후기를 남겼다. 낭독을 들으며 한 글자 한 글자 종이책으로 따라 읽었던 거였다.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었으니 틀린 글자가 얼마나 도드라져 보였을까. 빨간 색연필로 좍좍 빗금 친 답안지를 받아든 아이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글자뿐이랴, 부자연스럽게 끊어 읽거나 잘못된 발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고용주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낭독에 매번 인사치레를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봐선 낭독자를 고용해도 별 지장 받지 않을 만큼 고소득의 전문직 여성이다. 낭독하는 동안은 나도 이 일이 전문직이라 여기며 적어도 돈값은 하자는 생각에 나름 애썼다. 먼저 묵독하고 소리 내어 읽어서 시뮬레이션 한 뒤 녹음했다. 녹음이 완료되어야 숙제를 마친 학생처럼 통잠을 잘 수 있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겨 낭독하지 못할까 봐 이틀 치 녹음을 쟁여두었다. 날마다 보내라는 언질은 없었지만 혼자 규칙을 정하고 그대로 따랐다. 아침 일찍 집 앞에 놓인 신문처럼 꼬박꼬박 배달했다.


며칠 새 이어도에 매료되어 그곳 바다 기슭을 어슬렁댔다. 읽을수록 주인공의 안녕이 궁금해졌다. 안면을 튼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하고 싶어 점점 마음이 달아올랐다. 결국, 그 많은 불신을 안고 시작한 낭독은 치졸한 편견에 기인한 것으로 판명이 나버렸다. 낭독은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밥알 같다. 낭송가들은 시를 신앙처럼 떠받드는 사람이라더니 그래서 내가 이어도와 사랑에 빠진 걸까.


녹음할 때는 주위 환경이 중요하다. 방문을 닫는 것으로 불안해서 문을 잠그고 둘레를 정돈했다. 스마트폰 소리도 묵음으로 바꾸고 깨끗한 음질을 얻고자 앉는 자세도 곧추세우며 신경 썼다. 녹음이 시작되면 20분이 넘게 끊어짐 없이 계속되었다. 중간에 멈추고 쉬었다가 다시 이어가는 기능을 나흘째쯤 알아냈다. 뭘 모르면 손발이 고생이라더니 지독한 기계치라 손발을 대신해 입이 고생바가지였다. 유난히 꼬이는 단어는 여러 번 연습해도 연거푸 버벅대기 일쑤였다. 돌부리에 넘어졌는데 매번 그 자리에서 처음처럼 엎어지는 꼴이다. 혼자 홧홧 골내고 삭히고 아무 일 없듯이 넘어진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시나브로, 물아래서 동동대며 발을 저어도 수면 위로는 우아한 자태를 뽐내야 하는 백조 신세가 되어 갔다.


대화체는 서로가 주고받듯 음성을 꾸며내야 할진대 낯간지러워 어설프게 낭독하는 바람에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여러 사람이 등장하는데 혼자서 여러 사람인 체하기는 얼마나 휘달리는지 머릿속은 번번이 헝클어졌다. 갈무리하고 모니터해보면 한 사람이 독백하듯 읊조려서 사람들 간의 구분이 뭉개졌달까. 진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남자인데 지역이 아리송하거나 여리여리한 여자 입술에서 자갈치아지매의 목청이 튀어나왔다.


이‘어’도로 눈은 읽지만 입은 이‘으’도로 달싹였다. 섬 이야기답게 섬이라는 글자는 왜 그리 많은지 ‘섬’으로 읽어도 ‘슴’에 가깝게 발음이 되었다. ‘섬’과 맞닥뜨리면 찰나이긴 해도 멈칫했다. 소설 속의 무수한 ‘슴’들은 곳곳에 침투한 지뢰였다. 나는 뼛속 깊이 경상도 사투리에 젖어있다. 부드러운 서울 말씨에 견주면 백번 양보해도 괄괄한 경상도 억양이다. 태생이 이러하니 열과 성을 다하려는 갸륵한 내 뜻은 사뿐히, 아니 무참히 즈려밟혔다. 눈이 표준어로 입력해주어도 입은 사투리 발음으로 출력해버리는 식이다. 눈이 입에게 ‘그것도 잘 못 하냐’ 섭섭하다고 나무랄 지경이었다. 끝끝내 둘의 훈훈한 조합은 보지 못했다.


녹음은 목소리의 복사기다. 후다닥 끝내려 급히 읽어버리면 모양새가 흐트러져 조급함이 음성에 묻어났다. 더구나 쉼표나 마침표가 보이거나 단락이 끝나면 짧게 멈추거나 조금 길게 멈추는 방법으로 호흡을 조절해야 된다. 멈추지 않고 내달린다면 표현이 모호해지고 수다를 늘어놓는 말처럼 저급해져 격이 떨어져서다. 문장부호에 밀접히 따라간다는 건 운전을 하다 마주치는 표지판에 순응하는 모범운전자 같달까. 품위 있는 낭독을 위해 그때그때 나오는 표지판 신호를 지키는 게 이득인 셈이다.


새는 발음은 또 다른 복병이었다. 이의 부교합으로 발음할 때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기도 한다는데 치아 탓으로 몰아가면 나는 아예 낭독이 아니라 입을 열어 말도 말아야 한다. 유력한 용의자는 비단 이것 말고도 있다. 혀가 짧아서, 턱이 잘 안 맞아서, 발성을 이상하게 해서도 낭독에 어려움을 겪는다. 나는 조금씩 두루 갖춘 편이다. 이처럼 단점 보따리를 끌어안고 내가 하겠노라, 손을 번쩍 들었으니 돈키호테도 혀를 내두를 무모한 자신감이다. 벌써 눈이 침침해서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또렷한 글자를 낚을 수 없다는 건 보따리 속에 싸지도 않았다.


전문 낭송가들의 유려한 음성을 참고삼아 들었다. 참기름을 한 사발씩 마시고 읽는지 미끄러지듯 흘러간다. 여태 예사로 듣던 낭독이 얼마나 위대하게 들리는지 감탄에 감탄을 거푸 하며 들었다. 목소리며 발음이며 대화체를 감당해 내는 솜씨도 더할 나위 없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분위기 역시 직접 글을 쓴 작가가 아닌지 착각이 들었다. 나보다 무엇이든 월등히 나았다. 모름지기 프로란 이런 거라며 빼어난 낭독으로 나를 지그시 눌러버렸다. 나는 언감생심 프로로 문패를 내걸 것도 아닌 한낱 이미테이션이다. 되려 낭독의 즐거움을 알게 해준 값진 시간이었다. 지금은 읽고 싶은 글을 친근한 나의 표준말로 녹음해서 산책할 때 듣곤 한다.


낭독은 목소리로 전하는 일인 연극이다. 무대 위에서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북 치고 장구 치고 그러면서 가재도 잡고 도랑도 쳐야 한다. 장장 7일간 열린 일인 연극에 나는 배우로 그는 관객으로 역할에 충실했다. 카톡으로만 접선해서 끝내 내 목소리만 퍼져나간, 돌아오지 않은 메아리였던 게 다소 아쉽다. 나의 의뢰인이 다시 찾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어쩐지 두 번 속을 것 같지 않아 열없는 웃음으로 마음을 접는다.



2022년 에세이문학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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