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자 혼자 다녀도 전혀 해가 되지 않는 나라

카리브해의 누에-쿠바

by 보리

코발트 포장으로 감싸진 책을 여니 속표지는 더 짙은 코발트색이다. 하필, 이 색이지? 읽다보니 코발트색에는 숨은 의미가 있었다. 헤밍웨이는 쿠바 사랑으로 유명하다. 집필을 위해 머물렀던 호텔에서 창으로 보이는 하늘도,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된 바다도 분명 코발트 색이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작가가 눈으로 보았으니 다른 빛깔 벽지를 선택할 생각은 없었겠다. 책 표지에 ‘매가 날지 않는 쿠바 하늘은 마침표 빠진 문장이다.’라고 새겨졌다. 매가 나는 쿠바 하늘이 코발트 빛깔이지 않으면 무엇이겠는가. 이 문장은 책이 한껏 문학적일 것임을 암시한다. 호객행위 같은 이 문장에 나도 책을 집었는지도. 작가 프로필을 보니 김득진 작가는 시인이면서 소설가이다. 여행 산문집인데 어쩐지 문학적인 냄새가 많이 난다 했다. 읽다 보면 시를 쓰려다 소설을 쓰려다 애써 지운 흔적이 나에게만 보였을까. 그중 한 문장을 길어 올려 책 표지에 걸어두었나 보다.

카리브해의 누에가 쿠바라고 단정 지어버리는 작가 때문에 누에라는 별칭이 어울리는지 까닭 찾기에 나섰다. 인간에게 이롭기만 한 생명체가 누에라면 과연 그런 누에 같은 역할을 쿠바는 했을까. 이만한 찬사도 없을 텐데 쿠바는 그에게 무엇을 선물했을까.


책을 읽을수록 가보지도 않은 쿠바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나를 발견했다. 어디를 가도 꾸밈없이 웃는 선한 이웃들을 작가는 나에게 소개한다. 속으로 ‘올라?’ 하며 인사를 건넬 만큼 나도 그들과 친해 버렸다. 쿠바노들은 그들이 내놓는 식탁 위 음식에서나 살가운 미소에서나 느림의 미학이 몸에 밴 면에서도 능히 누에를 닮았다. 아니 오백 년 가까이 저장한 카리브 햇살도 어찌 누에스럽지 않을까.

책에서 마주친 이웃 중 으뜸은 체 게바라이다. 장 뽈 사르트르가 말하듯 우리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인 그는 실상 쿠바사람이 아니더라. 미국의 압제에서 쿠바를 구하고자 의사 가운을 집어 던진 혁명가이다. 그래서인지 어디를 가나 쿠바혁명을 성공시킨 체 게바라를 만난다. 쿠바노에게 그는 잊힌 사람이 아닌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지도자인 셈이다.

풍족하지 않은 공산품으로 요구르트병마저 재활용해 반영구적으로 쓴다. 툭하면 물이 끊어지고 정수리에 내리꽂히는 햇살로 혀를 길게 낸 개처럼 늘어지게 하지만 미워하기엔 쿠바는 사랑스런 구석이 넘치고도 넘친다. 천연 자연이나 사람들의 마음만은 때가 묻지 않았다. 농약이 무엇인지 모르게 온통 유기농 천지의 나라다. 오히려 화학제품이 턱없이 비싸기만 하다. 우리와 정반대로 흐른다. 작가는 아마도, 한국의 70년대가 그리워 찾아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의 말처럼 어릴 적 기억에서 오염이란 단어를 쏙 빼면 쿠바의 현재 모습과 흡사하다 했으니. 이런 연유에서 쿠바를 가난한 선진국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가난과 선진국이 어깨동무한 이 이상한 조합은 대체 뭐라고 해석해야 할까.

작가는 한때 커피에 미쳐 유기농 산지로 이름난 쿠바를 알게 되었단다. 그렇다고 직접 눈으로 확인하러 쿠바로 떠나는 무모함에는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돈키호테라면 로시난테나 있지 그는 낡은 두 다리가 전부이니 딱할 노릇이었다. 체 게바라와 헤밍웨이가 과거형이면, 김득진 작가는 현재진행형으로 쿠바와 사랑에 빠져있다. 오로지 거리 곳곳을 애꿎은 다리만 믿고 쏘다녔다. 지칠 때까지 걸어서 그가 보았던 것을 낱낱이 사진으로 찍고 글로 남겼다. 사랑하는 연인을 마구 찍어대지만 그래도 성에 안 차 숙소에서 밤새 연서를 휘갈기듯 적어나가지 않았을까. 이토록 절절하게 세세하게 풀썩대는 먼지도 만져질 만큼 촘촘히 기록하였으니. 아마도, 이 책은 자신의 연인 쿠바를 우리에게 자랑하는 팔불출 사내의 사랑가인 것만 같다.


도입부에는 쿠바혁명을 소개하나 싶더니 정열적인 남자들 이야기였다. 어쩌자고 나는 쿠바 역사를 이리도 재미나게 알아버렸을까. 소설가 기질을 다분히 살린 도입부 덕에 감쪽같이 페이지가 휘리릭 넘어갔다. 그들을 미리 만나고 거리를 나서길 얼마나 다행인지 읽을수록 그 남자들은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나타났다. 이미 아는 남자들이 되어버렸으니 어느 도시에서 마주쳐도 당황하지 않고 올라? 인사했다. 미국이 저질렀던 만행이나 불평등 조약으로 상처 입은 쿠바사람들은 춤추고 노래하는 것으로 상흔을 승화시켰음을 알았을 때는 마음이 아렸다. 작가가 삶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사람에게 쿠바가 더없이 좋은 곳이라고 추천하는 데는 이런 까닭이 있었을 테지.

작가는 배가 고파 허기로 자주 힘들어했다. 반대로 체해서 소화제로 매번 속을 달랬다. 단수되어 샤워하다 웃통 벗고 뛰쳐나오기도 했다. 변기에 물이 내려가지 않아 난처한 경험을 어찌나 낱낱이 적었는지. 작가는 틈만 나면 이런 열악한 환경에 툴툴댔다. 책의 상당 부분은 굶주림과의 전쟁을 글로 썼달까. 영락없는 국제걸인이었다. 그럼에도 쿠바를 일곱 차례 방문하였으니 작가는 쿠바 중독자임에 틀림이 없다. 사서 하는 고통이니 딱히 동정이 가지는 않지만 나는 언제 허기로 절절맸었나 생각해보니 기억이 없다. 물이 끊어져 고생한 장면은 늘 책에서만 접했다. 나는 너무 풍족한 삶이다. 내 삶과 대비되는 삶을 이 책은 보여준다.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기 전에 쿠바를 다녀온다면 자동으로 미니멀해지지 않을까.


일곱 차례 쿠바행은 그들과 정이 들어버려서 다시 찾았을 테지. 생계를 잇기 위해 평생 모은 책을 내다 파는 눈빛이 그지없이 맑은 여류시인, 함께 비질하고 페인트칠하며 친해진 캠프 관리인, 랍스터 요리로 배불리 먹여준 마리린, BTS에 열광하는 아이들의 수줍은 미소가 그를 다시 불러들였겠다. 어설픈 스페인어로 의사소통도 불편했을 텐데 작가는 오로지 쿠바로 직진만 했다. 망고에게 꿀밤도 맞아가며 몇 배나 되는 바가지요금도 맞아가며 기다리던 버스에 바람도 맞았다. 사랑에 빠진 남자가 아니면 누가 이런 시련을 인내할까.

나는 어쩌다 보니 형제간들이 먼 나라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살고 있지만 한번도 그들이 사는 나라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카리브해의 누에, 쿠바는 이런 나를 움직이는 책이다. 역병만 끝나면 쿠바로 달려가고 싶다. 페이지마다 자랑삼아 칭찬하는 유기농 채소들도 아삭아삭 씹고 싶다. 차마, 시가를 입에 물지는 않겠지만 잠시 냄새라도 맡고 싶다. 유기농 설탕이 듬뿍 발린 추러스도 입 둘레로 덕지덕지 묻혀가며 아바나 골목을 걷고 싶다. 참숯이 든 드럼통에서 익어가는 피자는 어떤 맛일까. 볼 것도 할 것도 먹을 것도 기대된다. 이 책 따라 하기만 흉내내도 한 달은 거뜬하겠다.

이 책만 옆구리에 끼고 쿠바를 가면 어디든 갈 수 있겠지. 여자 혼자 다녀도 전혀 해가 되지 않는 나라라고 떠벌리는 작가 말이 솔깃하다. 말뿐이라면 믿기 어려울 텐데 한 권 속에 든 무수한 인증샷을 보여주니 믿을 수밖에. 쿠바 갈 계획을 한 사람들에게 예비지식으로 안성맞춤이라더니 계획 없는 나까지 포섭하는 솜씨가 제법 영업에 자질이 있는 작가이다. 역병만 끝나 보라지. 헤밍웨이가 묵었다는 호텔부터 착착 훑고 다닐 참이니.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