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이라는 책은 언제나 나에게 숙제였다. 읽어내야 할 과제 같은 책이랄까. 독서모임이라는 더없이 좋은 명분으로 드디어 월든으로 발을 들였다. 그런데 월든이 이국의 낯선 땅이어선지 발걸음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첫 챕터에서 서성거리기만 했다. ‘숲 생활의 경제학’은 읽어내기 고역이었다. 시시때때로 세상을 엇나가는 사춘기 아이로 빗대는 느낌이 들었다. 반대를 위한 반대는 아닐지라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비판적이었다. 나는 이 지점이 부대꼈다. 하지만 그의 말은 한마디도 허투루 들을 게 없었다. 그 시대 배경을 고려하면 세상은 한참 야단맞을 짓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의 말처럼 들떠 있고 신경질적이며 어수선하고 천박한 때였다.
소로는 사람들이 그릇된 생각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거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지와 오해 때문에 부질없는 근심과 과도한 노동에 몸과 마음을 빼앗겨 인생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고 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 역시 인생의 아름다움보다 입에 들어가고 편히 쉴 집에 초점을 맞추고 살았다. 가장 현명한 사람들은 항상 가난한 사람보다도 더 간소하고 결핍된 생활을 해왔다면서 간소하게 살 것을 거듭거듭 언급했다. 간소하게, 간소하게, 웅변조로 내 귀에 딱지가 앉게 외쳤다. 흔들리는 5층 석탑처럼 물건들을 쌓아놓고 사는 나를 위한 맞춤 조언 같았다. 보이는 물건만 그럴까. 내 생활 전반에 간소하게 추려야 할 여러 부면이 있기에 잔소리로 들리지는 않았다. 소로는 44세에 폐결핵을 앓았고 다음 해 사망했다. 폐결핵의 주된 원인 중 하나는 영양실조이다. 나는 그의 지나치게 절제된 식생활이 범인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어느 정도 읽어나가자 비판하던 그의 손끝이 무디어졌는지 한층 문체가 말랑말랑해졌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1845년 월든 호숫가로 들어가 2년 2개월을 살았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 숲으로 들어갔다고 밝혔다. 의도적이라는 단어는 계획적, 고의적, 의식적이라는 비슷한 뜻이 있다. 소로우가 지금껏 우발적이고 자연스럽게 흘러간 인생을 살았다면 월든에 들어감으로 역행해서 살아본다는 것이다. 그로서도 대단한 프로젝트였다. 소로가 16세에 하버드에 입학한 게 자연스럽지 않은데 그는 우리와 기준점이 달랐다.
의도성을 가지고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스쳐지나가는 바람이나 아침마다 보는 태양도 사뭇 다른 표정으로 볼 것이다. 월든 호숫가의 물의 변화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와 줄긋기 된 모든 자연에 의도성을 띠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라본 대로 기록했다. 단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관망했다면 우리는 월든의 속살을 지금도 알아차리지 못했지 싶다.
쭈볏대던 내 두 발을 막상 월든으로 들여놓자 숲속의 일상은 내 일상으로 들어왔다. 2023년 봄, 내 방에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1845년 월든 호숫가로 달려갔다. 180여 년 전 그곳에는 매연을 품어내는 자동차도 스마트폰도 버튼만 누르면 따듯해지는 보일러도 횟수가 한참 남은 암보험도 없다. 언급한 것들은 소로가 가진 것들과 견주면 너무나 초라한 나의 사유재산이다. 소로는 숲에서 만난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에 말을 걸어서 이웃이 되었다. 그것이 소로의 재산이었다.
자연의 소리 중에 올빼미 우는 소리가 가장 우울한 소리라고 정의하기까지 그는 몇 번이나 들었을까. 개구리들끼리 주고받는 소리를 술잔 돌리는 의식으로 묘사한 소로는 꽤나 동화작가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다. 한 문단에서 열네 종의 동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열거하지만 나는 지나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마치 우리 반 친구가 누구누구인지 뽐내는 유치원생 같았다. 그것도 성에 안 차는지 옻나무나 검은딸기 리기다소나무 따위의 식물을 연이어 언급한다. 그것들을 다 품고 살았기에 소로는 월든에서 가장 부자였지 않았을까.
구둣가게 직원은 사람의 신발만 보고, 미용사들은 사람의 헤어스타일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고 하듯이 내가 월든을 읽으면서 주목한 부분은 문학적인 글쓰기다. 읽을수록 소로의 사물을 묘사하는 기법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호시탐탐 골똘히 보았으면 번뜩이는 표현이 줄줄 흘러넘칠까 싶었다.
새끼손톱보다 작은 콩을 위해 15쪽이 넘는 분량을 할애한다. 심지어 콩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소로다. 그 스스로 콩하고 맺은 긴 교제라고 했을 정도이니 말해 뭐할까. 우드척이 상당 부분을 먹어치워도 녀석을 이해한다. 게으른 사람이라고 수근대는 동네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만 자기만의 방식으로 수확까지 밀고 나간다. 일꾼도 없이 개량 농기구도 없이 홀로 몹시 더디게 꾸려나간다. 호미가 돌에 짤그랑 부딪히는 소리를 음악이라 한다거나 괭이질을 하다 만난 산비둘기를 긴급히 전해야 할 통신문을 가지고 날개짓 하는 것이라 했을 때는 독자로 하여금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켰다. 확실히 소로의 세밀한 묘사로 덜 지루하게 읽을 수 있었다.
다소 딱딱한 이 책을 읽으면서 웃기도 하고 마음이 찌르르 아파오기도 했다. “손님 대접의 예우는 손님을 최대한 멀리 떼어놓는 기술이 되어버렸다. 주인이 손님을 독살하려고 노리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요리는 비밀스럽게 준비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맞아 맞아, 하며 혼자 낄낄댔다. “인간의 탈을 쓴 사람이라면 철없는 소년 시절을 지나고서도 자기와 똑같은 조건으로 생을 살아가는 뭇 동물들을 무분별하게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산토끼는 어린아이처럼 운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는 명치 끝이 뻐근해져 왔다.
어느 부분을 낭독할지 급한 대로 페이지 끝을 접었는데 그 부분이라는 것이 너무 많아져 별안간 책이 부풀어 두툼해져 버렸다. 애써 줄이고 줄였는데 말이다. 나는 자주 책 끝쪽을 열어보았다. 그가 언제 적 사람인지 시시때때로 잊어버려서다. 사실 잊어버렸다기보다 우리와 동시대 사람이지 않을까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문드문 나오는 마차나 1845라는 숫자 정도가 시대를 알려주는 신호등 역할을 했다. 그 외는 달리 요즘과 차이가 나지 않았다. 어쩌면 180년 전이 더 옳고 그름이 선명하게 구분이 되어보였다. 그러기에 지금도 월든을 찾는 순례객들이 끊이지 않는 까닭이겠지.
생명에 있어 높고 낮음이 없음을 소로는 몸소 보여주었다. ‘예전부터 알고 지내는 소나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깊은 눈 속을 헤쳐나가기도 하고’ ‘나와 절친한 밤 친구인 호수의 얼음이 우는 소리’를 듣고자 찾아가기도 했다. 참새 한 마리가 어깨에 잠시 내려앉은 일을 두고 어떤 훈장보다도 영광스럽게 느낀다는 것은 얼마나 겸손한 자세인가. 다람쥐와 야생의 생쥐들이 보관해둔 호두를 서로 먹으려고 다투는 모습을 보고도 따로 손쓰지 않았다. 보통 사람 같으면 다툴 것도 없이 그들 손에 닿지 않는 곳에 꽁꽁 싸서 숨기려 했을 게 분명하다. 나는 여러 번, 아니 읽을 때마다 소로의 관대한 성품을 보았다. 그가 심고 밭을 매었지만, 결코 혼자 먹고자 쟁여두지 않았다. 추운 겨울 집 안에 파고든 벌레들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게 소로의 의도적인 삶의 방식이었다.
월든이 아닐지라도 소로는 이런 책을 지었을 게 뻔하다. 어딜가도 월든 만큼의 풍경은 있지 싶다. 단지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그곳에 소로가 오두막을 짓느냐는 것이다. 소로의 의도적인 눈빛으로 본다면 그곳은 월든이 된다. 결과적으로 월든이 소로를 만났으니 월든이 로또를 맞은 것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