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글동글
목욕탕에 가면
엄마는 동그랗게 말고 있는 내 몸에서
팔을 끄집어내고
다리를 만들어 줘요.
팔, 하면 팔
다리, 하면 다리를
이번에는 내 차례예요.
나는 동그랗게 말고 있는 엄마 등에서 때를 밀어
우리 민서 많이 컸네!를 만들어요.
두 손으로 쓱싹쓱싹 만들어요.
기억 상자
여섯 살까지 살았다는 동네에 가 봤어요
이쯤이었어,
엄마가 빈터에 막대기로
대문을 그려요
-그때 너 요만했는데
엄마가 배꼽 아래를 가리켜요
-아, 맞다 네가 공 꺼내려다 장미에 찔렸잖아
내 손등에서 장미 가시를 꺼내요
엄마는 장미 넝쿨 너머 시소도 그리고
좁은 골목도 그려요
나는 시소 위에 앉아
기억을 하나씩 꺼내
입안 불룩하게 굴리고 굴려요
알사탕처럼 기억이
동글동글 굴러가
골목 가득 환하게 번져요
겨울밤
할머니 무서워요.
밖에서 칼 가는 소리가 나요.
귀신이 긴 머리칼 풀어 헤치고 입에는 칼을 물고
뾰족뾰족한 긴 손톱으로
벽을 뚫어 나를 엿보는 것 같아요.
쨍쨍 바람 부는 오늘 같은 날
문밖에 누가 있겠냐.
할머니는 거칠거칠한 손바닥으로
내 발바닥을 쓱쓱 문질렀다.
할머니는 길고 뾰족한 바늘을
흰 머리칼에 쓱쓱,
입에 흰 실을 물고 저기 봐라, 하더니
내 손가락 마디를 톡!
검고 붉은 피가
방울방울 솟아올랐다.
문틈으로 엿보던 귀신이
오들오들 떨며
뾰족한 자기 열 손가락을
호호 불며 침을 쭉쭉 바를 것 같은
겨울밤이었다.
모서리 아이
선생님께 혼나고 투덜투덜 모퉁이를 돌다가
상자 모서리에 무릎을 부딪혔다
씩 씩
화가 나서 상자 안을 들여다봤다
상자 모서리 안쪽
가장 오목하고
가장 어두운 곳
내 또래 아이만 한
민들레 하나
숨어
울고 있었다
메아리
작은 새는
메아리를 본 적 있는데
아주 작고 귀엽게 생겼더래요
갈래머리를 하고
땡땡이 반바지를 입고 있더래요
메아리는 작은 바위에 혼자 앉아
나뭇잎을 똑똑 따며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다가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
뒤꽁무니를 졸래졸래
따라 내려가더래요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났다. 2016년 『창비어린이』 동시 부문 신인문학상, 2017년 『시인동네』 시 부문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2019년 『외톨이 왕』으로 문학동네 동시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시집 『아는 낱말의 수만큼 밤이 되겠지』, 동시집 『미지의 아이』(공저) 등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