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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우 Mar 15. 2023

[순우의 여행노트 11] 제주 해녀

해녀박물관 탐방기

  해녀

  해녀(海女)는 바다 여자? 하지만 해녀는 바다 여자가 아니다. 영어로는 Sea Woman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바닷속에 들어가 해산물을 따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여자가 해녀(Haenyeo)다. 해녀는 다른 나라에는 없다. 그만큼 특이하고 세계적으로 ’희귀한 존재‘라고까지 말한다. 해녀를 제주에서는 잠녀 또는 잠수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건(李健)의『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 1628』와 이익태(李益泰)의『지영록(知瀛錄), 1665』에는 ’잠녀(潛女)‘라는 기록이 나온다. 화공 김남길이 그린『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1702』라는 채색도의 「병담범주(屛潭泛舟) 」편에는 물질하는 해녀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위백규(魏伯珪)의『존재전서(存齋全書), 1791』에는 ’해녀(海女)‘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제주풍토기』에서는 “잠녀(潛女)들이 벌거벗은 몸으로 낫을 들고 바다 밑으로 들어가 미역을 따고 나온다”고 설명했다. 『존재전서』중의「금당도선유기」에는 ‘海女’라는 말이 나온다. 그는 전남 완도 인근 평이도(平伊島)의 무레꾼*을 보면서 ‘順風流到平伊島. 統浦觀海女採鰒. 其裸信佩瓢到入深淵.(순풍이 불자 배를 띄워 평이도에 이르렀다. 포구에서 해녀들이 전복 따는 것을 구경했다. 이들은 벌거벗은 몸을 박 하나에 의지하고, 깊은 물속에 자맥질했다.)’라고 기록했다.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주로 남자들이 물질을 했지만,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여자들이 물질을 시작했다고 한다. 20세기에 들어서서는 물질은 여성 전유의 일이 되었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제주에는 2만 명이 넘는 해녀들이 있었다.

  * 무레꾼: 남녀 구분 없이 바닷속으로 잠수하여 해산물을 채취하는 사람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1702』그림 속 해녀(동그라미 안. 자료: 다음 - 매일경제)

  그 명칭이야 어쨌든 미역, 해삼, 전복, 소라와 같은 해산물이 사람들의 먹잇감으로 활용되던 아득한 옛날부터 무레꾼들은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는 여자들이 먼저 바닷속으로 거꾸로 자맥질해 들어갔다. 그들은 그들의 무수한 숨을 물결치는 바다 위로 토해내며 자신들의 숨과 삶을 이어나갔다. 그들 하루하루의 바닷속 생활이 삶이 되고, 그 삶의 흔적이 쌓이고 숨결이 남아 제주의 역사가 되고 문화가 되었다. 절박하지만 질박했고, 고단하지만 해녀들의 삶은 그들만의 신앙, 노래와 춤, 설화, 물질하는 도구와 복식을 만들어냈다.

     

  숨비소리로 이어가는 해녀의 삶

  해녀는 제주의 사람들, 수많은 여성의 삶 그 자체였다. 이르게는 열 살 쯤부터 물질을 배우기 시작해서 정년도 없이 평생을 바닷속 물로 뛰어들었다. 겨우 8살에 물질을 시작한 이가 있었다고도 하고, 아기를 낳은 후 3일 만에 다시 물질을 시작했다고도 한다. 바닷물에 뛰어들어 미역을 채취하고 전복과 해삼을 따는 일은 그들의 생계 수단이자 직업이었다. 그것은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없었던 척박하고 험난한 환경의 제주 여성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숙명과도 같았다. 극한에 가까운 상황 속에서 뛰어들어야 하는 바닷속, 해녀들은 조금과 사리의 물때를 맞추고 파도와 바람을 이겨야만 했다. 그 많은 제주의 바람 – 갈바람, 샛바람, 마파람을 견뎌내야만 했다. 한편 해녀들이 있는 바닷가에서는 연신 그들이 뿜어내는 숨비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물질 가는 옛 제주 해녀들(고 김홍인 선생이 촬영한 1950년대 사진. 제주시제공 자료: 연합뉴스)

      

  숨비소리 – 제주 해녀들이 장시간 물질을 하다가 수면 위로 떠 올라 막혔던,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는 휘파람 같은 소리가 숨비소리다. 1분, 2분... 바닷물 속 바닥에서 전복과 해삼, 조개를 따고 올라와 토해내는 모아둔 숨소리. 눈앞에 있는 또 다른 조개 하나를 더 따서 망사리에 담기 위해 가쁜 숨을 얼마나 더 참아야만 했을까? 바닷속 깊은 물은 얼마나 차가웠을까? 좀 더 좀 더 그들은 깊은 바닷속을 향해 거듭 거꾸로 자맥질하여 들어갔을 것이고, 오랫동안 참았던 숨만큼 더욱 큰 숨비소리를 토해냈을 것이다. 물 위로 박차고 올라와서 숨비소리를 내는 순간 다시금 살았다는 환희를 맛보며 햇빛과 공기의 크고 깊은 새 숨을 들이마셨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숨비소리를 낼 수 있는 한 자신이 삶이 이어지고 있다는 심정으로 또다시 깊은 바닷속으로 발버둥 쳐 내려갔을 것이다. 지금은 3,000여 명으로 그 숫자가 줄어든 해녀들의 숨비소리는 아직은 오늘도 제주의 바다 어딘가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을 것이다.  

   

  해녀들은 제주의 바다, 땅과 물, 바람의 조화가 만들어내는 자연의 일부였다. 그들은 햇빛과 바람, 파도와 같은 자연 현상에 적응하여 이들과 함께 유영(遊泳)했다. 그리고 바닷속 자연이 만들어내는 신묘한 생명체들의 세계 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갔다. 바닷속의 생명체들이 그러하듯이 그들 역시 살기 위해 움직이고 활동하며 먹을 것들을 취했다. 하지만 자연이 주는 만큼, 숨비소리를 내서 생명의 끈을 이어가면서 생존을 위한 양식을 구할 정도의 자제하고 절제하는 삶의 방식을 살았다. 해녀들은 끈질긴 삶, 상생과 조화, 공존의 지혜를 살아냈다. 사회 주류의 흐름에서 살짝 비켜나 있었지만, 해녀의 삶은 가장 특징적인 제주 문화 현상의 하나가 되었다. 그 응축된 삶의 숨결과 애환은 제주 역사와 문화의 본질이자 원형의 하나가 되었다.

물질 하는 해녀(1957년. 자료: 국가기록원)


  해녀박물관

  ‘토끼와 거북이’에서 점심 식사 마치고 우리가 향한 곳은 ‘해녀박물관’이었다. 제주 시내로부터 동쪽의 해안도로를 따라 약 30여 Km의 거리에 있는 이 박물관은 제주 사람들의 삶과 문화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제주 해녀에 관한 것들을 한 군데 모아놓은 곳이다. 해녀박물관은 제주 섬 동편의 성산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인 구좌읍 하도리에 자리해 있다.  

    

  언젠가 섬의 동남쪽 해안에 있는 제주민속촌을 탐방하면서는 제주의 보통사람들이 살아가던 옛 모습을 돌아볼 수 있었다. 띠집과 외기둥집의 초가, 제주 꺼멍도새기 흑돈의 우리, 통나무배 테우, 그리고 듬북, 몰망 따위의 해초를 베던 기구인 세계에서 그 길이가 가장 긴 낫이라는 줄아시, 자리돔 떼를 관찰하던 수경 등 제주만의 것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제주의 해녀박물관에서는 그보다도 더욱 특별한 제주 해녀에 관한 모든 것들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해녀박물관(자료: www.visitjeju.net)

      

  해녀박물관은 크게 3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1층의 제1전시실에서는 1960~1970년대 해녀들의 생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해녀들이 살았던 제주 전통의 초가인 띠집의 특이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느 해녀가 살았던 집과 생활용품 등을 통째로 옮겨놓은 것인데 집은 돌과 흙으로 아주 야트막한 높이로 벽을 쌓아 올린 초가다. 방은 서너 사람이 누우면 여분의 공간이 남지 않을 만큼 좁다. 한 뼘 남짓한 폭의 작은 툇마루, 댓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낮은 돌계단, 한 아름의 나무도 넣을 수 없을 만큼의 좁다란 아궁이, 보잘것없이 자잘한 세간살이... 띠집 초가의 처마 아래에는 해녀들의 물질에 사용되던 테왁, 망사리, 빗창 등 독특한 모양의 도구들이 걸려있다. 해녀들은 두렁박이라고도하는 테왁 위에 가슴을 얹고 헤엄을 치며 깊숙한 바닷속으로 물질을 했다. 망사리는 해녀들이 해산물을 따서 집어넣는 망태기이다. 빗창은 전복을 떼어내는 데 쓰이는 도구다.

    

  제1전시실에서는 당시 서민들의 식생활을 엿볼 수도 있다. 소박하기 그지없는 밥상에는 전복, 성게 등의 해산물이 올라 있다. 자연환경이 독특하고 바다가 생활의 터전이었던 만큼 그들의 먹거리도 크게 색달랐던 듯하다. 해삼토렴, 성게국, 보말죽 등 처음 들어보는 음식이 대부분이다. 또 제주 바다 마을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해신당과 굿을 하는 광경도 모형 전시물로 재현되어 있다. 해녀들도 해신당에 가서 그들의 무사 안녕을 빌고는 했을 것이다.

물질도구 테왁과 망사리(해녀박물관. 자료: www.visitjeju.net)

      

  제2전시실이 있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의 벽은 바닷물이 가득 차올라 있는 듯 진 파랑의 색깔이다. 제2전시실에서는 해녀의 노래와 숨비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은 풍경이 재현되어 있다. 언 몸을 녹이며 물옷을 갈아입고 잠시 쉴 수 있는 불턱, 해녀들의 쉼터가 모형을 갖추고 있다. 불턱은 고참 해녀 상군과 어린 해녀가 함께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물질 요령을 가르쳐주기도, 서로의 정보를 나누기도 하는 공동체 공간이다. 이 전시 공간에는 1970년대 잠수복이 보급되기 시작하기 전에 물질 때 해녀들이 입었던 물옷 – 물적삼, 물소중이, 까무리, 물수건 따위가 전시되어 있다.

     

  해녀의 물옷인 하의 물소중이와 상의 물적삼을 보면 숙명적인 해녀들의 애틋한 삶의 모습이 묻어나는 것 같다. 무명으로 만들다가 나중에 면으로 만들었다는 이들 물옷의 모양새를 보면 기교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전혀 꾸미지 않은 단순 소박의 절제미가 느껴진다. 매우 서툴러 보이지만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숨겨진 멋과 완성미를 보여준다고나 할까? 윗옷으로 입는 물적삼의 모습을 보면 가슴으로부터 허리 부위의 한쪽 옷자락의 단추가 2단으로 달린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해녀는 8살 때부터 물질을 시작하기도, 아이를 낳고 3일 만에 물질을 계속하기도 했다고도 하지만, 임신으로 배가 부르게 되면 여기에 맞추어 옷깃을 늘려 입기 위해 단추를 2단으로 달았다고 한다. 까무리는 해녀가 쓰는 모자를 가리킨다.  

해녀의 물옷: 물적삼, 물소중이, 까무리 등(해녀박물관. 자료: www.visitjeju.net)

    

  제2전시실에는 해녀의 물옷 이외에도 제주 사람들 평상복의 하나인 갈옷과 생활 도구의 하나인 바구니 구덕이다. 차롱구덕, 애기구덕, 물구덕, 물허벅 등이 전시되고 있다. 차롱구덕은 대나무를 잘게 쪼개서 만든 바구니의 일종이다. 물허벅은 물을 길어 나르는 물 항아리다. 족쇄라는 특이한 이름의 왕눈이 물안경도 볼 수 있다. 물고기 떼를 관찰하는 도구다. 또 해녀들과 더불어 고기를 잡고 그물을 치는 뗏목과 자리돔을 잡는 떼배 태우, 마을의 불길한 징조를 막아주는 돌로 쌓은 방사탑, 그리고 돌담을 만들어서 고기를 잡는 돌그물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같은 2층의 제3전시실은 해녀들이 만들어낸 생활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해녀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동영상을 통해 보여주는가 하면, 그들의 토속 신앙과 세시풍속을 소개해 준다. 자신의 힘과 의지만으로는 이겨나가기 어려운 바다 일. 해녀들은 해신당을 찾아 그들의 안녕과 복을 빌었다. 또 잠수굿과 해녀 굿판을 벌여 흉과 액을 내쫓았다. 해녀들은 새해 처음의 물질을 나가기 전 음력 2월 초하룻날 하늘에서 내려와 바다의 바람을 다스린다는 영동할머니에게 영동굿 지드림을 바쳤다. 그리고 음력 5월의 원담 쌓기, 자리젓 담그기, 9월의 제주 옥돔 솔라니 낚기 따위의 세시풍속을 지켰다고 한다.


  박물관 관람의 마지막 코스는 제3전시실의 창밖으로 바라보는 해녀들의 모습이다. 물질의 철에는 창을 통해서 그 광경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해신당이 있다는 마을의 포구와 푸른 바다 밭이 가까이에 내다보인다. 물옷이 아닌 검은색 잠수복으로 중무장한 이 시대의 해녀들을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아직은 철이 이른지라 그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2016.02.27.)

해녀들의 숨터이자 공동체 공간인 불턱(해녀박물관 입체 모형. 자료: www.visitjeju.net)


*후기: '제주해녀문화'는 2016년 11월 우리나라에서 19번째로 UNESCO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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