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인기 있는 우리 여행지의 하나인 이국적풍경의 제주. 이렇게 또 저렇게 찾고는 하는 섬이지만 언뜻 그 이름이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가 궁금해졌다. 이리저리 찾아봐도 그 궁금증을 풀어주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옛적에는 제주를 탐라라고 불렀다는 설명 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아주 오래전 제주에 탐라국(耽羅國)이라 불리는 나라가 있었기에 탐라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제주(濟州)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濟州는 건널 제濟 자와 고을 또는 섬 주州 자가 합쳐진 이름으로 바다를 ‘건너야 하는 섬마을’이란 뜻으로 쉽게 해석을 할 수 있다. 탐라(耽羅)라고 하면 즐길 탐耽 자와 그물 라의 羅 또는 그물질할 羅의 耽羅, ‘그물질이 즐거운 곳’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제주의 바다에서 즐겁게 그물을 걷어 올리면 어떤 것들이 걸려 올라올까?
하나뿐인 누이의 칠순을 기념하여 누이와 동생 두 가족, 매형과 처남, 시누이와 올케, 시누이의 남편과 처남의 댁이 함께하는 여행이다. 구경도 구경이지만 맛있는 음식을 찾아 그 풍미를 즐기는 것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제주의 바다에서 즐겁게 걷어 올린 탐라의 별미를 찾아야 할 터다. 비행기에서 내린 시간이 마침 정오쯤이라 공항에서 멀지 않은 바닷가의 한 음식점을 찾았다. ‘토끼와 거북이’라는 제주 토속의 음식점이다. ‘토끼상’이라는 향토 정식 메뉴의 상차림, 제주 돼지 수육과 자리돔 강정을 첫 음식으로 보말 조개로 끓인 보말미역국과 갈치조림, 고등어구이가 올라온다. 밑반찬으로는 고사리무침, 톳무침, 이름을 알 수 없는 몇몇 반찬도 상에 오른다.
자리돔 자리물회
이 음식점에서는 사실 이렇게 그득한 정식 상차림보다는 자리돔 물회 한 그릇을 먹어야 한다. 하지만 자리돔 강정을 먹어보았기에 자리돔의 맛을 보지 못한 건 아니지만 제철의 자리돔 맛은 볼 수 없었다. 늦봄 보리가 익을 무렵이 돼야 싱싱한 자리돔을 상에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이 음식점을 찾았을 때는 그곳이 제주 향토 음식점이었던 만큼 가장 토속적인 메뉴를 주문했고 그 메뉴가 바로 자리돔 물회였다. 때는 5월 중순으로 자리돔이 제철인 시기였다. 농사 여건이 한층 더 어려운 제주에서도 과거 늦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보릿고개의 시기는 가장 배가 고픈 춘궁기가 아닐 수 없었다. 보리농사를 하지 않는 제주에서 보릿고개를 넘겨주는 게 바로 이 자리돔이었다고 한다. 늦봄부터 여름 한 철 자리돔이 제주 사람들의 양식을 채워 주었다.
자리돔은 해안가 낮은 수심의 산호나 암초 주위에서 서식하는 열대성 물고기다. 제주 특산으로 자리돔은 ‘자리’, ‘제리’, ‘자돔’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자리돔은 멀리 떠나지 않고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붙박이로 한자리에 머문다고 해서 ‘자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통영 지역에서는 자리돔을 ‘생이리’라고 부른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자리돔을 참새 작(雀) 자와 도미 조(鯛) 자를 써서 ‘雀鯛(스즈메다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자리돔의 색깔, 모양뿐만이 아니라 무리를 지어 자신이 태어난 곳을 떠나지 않는 습성까지도 참새를 닮은 때문이라고 한다.
자리돔 무리(자료: 네이버)
제주의 남쪽 해안 곳곳에서 자리돔이 잡힌다. 자리돔은 다갈색의 손바닥만 한 크기로 돔 종류의 물고기 중에서는 가장 작은 물고기다. 자리돔은 고추장에 찍어 먹는 자리 강회, 구이, 무침, 젓갈, 찜, 해물전, 강정 등 여러 종류의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지만 뼈째 썰어서 물회로 먹는 것이 제일 맛이 좋다고 한다. 물회의 맛이 처음에는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몇 숟가락만 꼭꼭 씹어서 먹어 보면 그 독특한 맛에 매료된다. 자리물회를 주문하면 제주 사람들이 평소에 누구나 푸짐하게 먹던 풍습에서 넉넉하고 수북하게 담은 큼직한 대접에 물회가 나온다. 그 값도 장터 뚝배기 설렁탕처럼 저렴하다. 자리물회는 제주 사람들의 소울푸드와 같은 것이다.
자리돔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자리돔은 낚기, 그물 등의 방식으로 잡지만, ‘테우’라는 전통 어선을 타고, 접는 부채 모양의 그물로 물고기를 떠내는 식으로 잡는데 이를 “자리를 뜬다”라고 한다. 자리돔은 번식력이 매우 강한 데다가 일정한 곳에서 무리를 이루어 살기에 이런 방식으로 물고기를 잡는다. 2002년에 월드컵 축구 경기가 열린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은 제주 전통 고깃배 ‘테우’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자리돔으로 유명한 서귀포시 보목포구 일원에서는 늦봄과 초여름 사이에 ‘보목자리돔축제’를 연다.
자리돔은 제주 사람들의 주린 배를 채워 주던 구황 음식이기도 하지만, 뭍에서의 보리와 감자와도 같은 건강식이기도 했다. 제주에는 “자리 알 든 해 보리 풍년 든다”는 속담이 있다. 또 “한여름 자리물회 다섯 번만 먹으면 보약이 필요 없다”는 말이 있다. 제주 사람 중에 허리 굽은 사람이 적은 것은 여름 한 철 흔하게 먹을 수 있었던 자리돔 덕이라는 말을 한다. 각 마을의 자리돔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다고 한다. ‘보목리 사람이 모슬포 가서 자리돔 물회 자랑 말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제주도에서 자리돔으로 가장 유명한 곳이 보목리의 보목항 지역이지만 다른 지역의 사람들 또한 자기 마을의 자리돔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다는 이야기다.
자리물회와 자리강회(자료: 네이버)
제주 흑돼지 꺼멍도새기
‘토끼와 거북이‘에서 점심을 먹고 동쪽으로 차를 몰았다. 일정표에 올라 있는 '해녀박물관‘과 ’김영갑두모악갤러리‘를 관람하고 어스름이 내리는 저녁 시간 서귀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저녁으로 어떤 제주의 맛을 즐길까를 고민했다. 마음은 사실 오래전에 들렀던 허름한 바닷가 식당을 향하고 있었다. 그 호텔로부터 걸어서 약 1.5km의 거리에 있는 서귀포 포구의 ’남궁미락‘이라는 식당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쯤 그곳에서 다금바리 생선회와 농어 매운탕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다금바리 생선회가 아주 희귀해지기도, 그 가격 또한 많이 비싸졌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다른 대안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호텔을 들어서는 길모퉁이에 ’서귀포흑돈‘이라는 간판이 달린 아주 현대적 건물이 있었다. 걸어가기에 알맞은 거리였다. 제주 사람들이 ’꺼망도새기‘라고 말하는 흑돈 (黑豚) 맛집임을 알 수 있었다. 문득 40년 전쯤의 기억이 떠올랐다. 같은 호텔에 머물면서 택시를 어울려 타고 다니며 2박 3일의 신혼여행을 함께 하던 우리 부부와 동행 부부 중에서 두 남자 간에 제주 똥돼지 맛을 보아야 하지 않겠냐는 의기투합이 이루어졌다. 당시 제주의 가장 잘 알려진 음식 중의 하나가 똥돼지 고기였다. 남자들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한 두 신부를 남겨 두고 두 남자는 서귀포 시내로 나가서 밤늦도록 제주 토종 돼지 안주에 소주를 곁들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지금 같았으면 두 남자 모두 당장 이혼감이 아니었을까도 싶은데...
옛날의 그 돼지가 이제는 제주 흑돈(黑豚)이라는 브랜드로 이름을 바꿔 제주 전역에 성업 중이다. 사방으로 유리창이 시원하고 모던한 실내 디자인의 ’서귀포흑돈‘집에서는 그 옛날의 토속적인 정취를 느낄 수는 없다. 하지만 메뉴판에는 늑간살과 항정살 두 가지 종류의 대표적인 구이가 올라있다. 갈매기살 구이도 있다. 이건 갈매기의 고기가 아니라 돼지의 가슴과 배 부분의 살코기다. 갈비뼈와 뼈 사이의 갈빗살인 늑간살은 살점이 부드러우면서도 졸깃하다. 목덜미 부분의 살인 항정살은 좀 더 쫄깃하고 달콤한 맛이다. 하루 여행의 피로가 제주 흑돈 구이와 한잔의 소주로 모두 풀린 듯했다.
제주 흑돈 꺼멍도새기(자료: 네이버)
녹차, 그리고 결국은 갈치조림
이튿날 일찍 길을 나선 우리는 섬 최서남단을 향해 바닷가를 달리다 두 곳의 차밭을 찾았다. 제주의 맛이라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맛의 차를 재배하는 곳이다. 처음으로 들른 곳은 서귀포시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차밭 도순다원(道順茶園). 중문단지 방향으로 가다가 강정항 근처에서 한라산 방향으로 오르막길을 한참 거슬러 올라야 한다. 뒤쪽으로는 한라산의 서남 녘이 멀리 바라보이고, 앞쪽으로는 멀리 바다가 내다보인다. 완만하게 비탈진 언덕과 산자락이 온통 차밭이다. 불모지의 땅을 차밭으로 일궈 너른 다원이 만들어진 곳이다. 아직 새 눈이 보이지 않는 찻잎은 4월 중순이 되어야 첫 찻잎을 딸 수 있다고 한다. 찻잎을 따는 사람도 찻잎을 모아서 나르는 트럭도 없고 찻잎을 덖는 공장의 굴뚝도 조용한 다원은 고요하기만 하다.
도순다원으로부터 남쪽의 용머리해안과 모슬포를 거쳐서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이는 오설록다원에 다다랐다. 가까운 곳에 유배되었던 조선 후기의 학자인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도 이곳의 다원이 있는 곳에서 딴 차를 마셨다고 한다. 광대하게 펼쳐진 차밭의 중심에 있는 차박물관 티뮤지엄(Tea Museum)에서 차의 역사적 숨결을 느껴본 뒤에 티라운지에서는 한 잔의 녹차를 즐기지 않을 수 없다. 또 그린 티 아이스크림(Green Tea Icecream)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다. 한라산이 만드는 안개인 해무의 그늘 속에서 자라는 화산섬 제주 차의 독특한 색과 향, 맛을 음미한다.
도순다원 풍경(자료: 네이버)
시간이 점심을 향해 가고 있다. 제주의 서남쪽 지역에서 맛보아야 할 별미는 무엇일까? 방어가 모슬포 지역 특별 요리의 하나라고 한다. 방어회와 방어 샤부샤부, 방어 죽, 방어 산적, 방어 떡갈비 등 매우 다양하다. 그런데 모든 건 철이 있는 법, 방어는 이제 철이 지났다고 한다. 방어 사촌인 부시리라는 물고기도 마찬가지, 방어라는 간판을 단 음식점은 개점휴업상태다. 그렇다면 밥때에 맞춰서 제주 시내의 동문시장 맛집으로 달려가 전복뚝배기나 성계미역국, 아니면 보말죽이나 보말칼국수를 먹어야 할까?
아니, 제주 시내로 가는 길목에 있는 애월읍 쪽의 갈치 음식점을 찾아가기로 했다. 인근 바다에서 제주은갈치가 많이 잡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 갈치 음식점에서는 바다에서 낚시로 갓 잡은 은갈치 요리를 상에 올린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 길이가 1m가 넘는 통 갈치조림이 상에 올라온다고도 한다. 소문이 난 ’ 소문난 맛집‘을 찾았다. 우리는 감히 통갈치를 주문하지는 못하고 조림과 구이를 함께 먹을 수 있는 간편 메뉴를 주문했다. 함께 조린 무와 감자가 폭 익은 조림은 조림대로, 노르스름하게 알맞게 익은 구이는 구이대로 맛났다. 결국은 갈치였다.
제주 은갈치(자료: 네이버)
늦은 점심을 마치고 제주 시내로 돌아오는 길, 아직도 귤이 매달려 있는 귤나무가 눈에 뜨인다. 40년 전쯤 3월 초 제주 신혼여행을 마치고 육지로 돌아가면서 주먹보다 큰 크기의 귤을 부모님께 드릴 선물로 포장해서 핸드캐리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귤이 귀하고 제주의 새로운 상징이 되기 시작하던 때의 일이었다. 이후 긴 세월이 흘러 한라봉, 천혜향 등 여러 종류의 신품종이 개발되기도 하고 농사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제는 귤이 흔하디 흔한 과일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겨울철 제주의 감귤처럼 신선하고 새콤달콤한 과일이 어디에 있을까! 택배로 주문해서 언제고 먹을 수 있으니 구태여 제주를 여행하는 중에 귤을 찾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번 여행 중 탐라 제주의 맛을 찾는 일은 이쯤에서 접어도 될 듯싶다. (2016.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