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둘러 배낭을 꾸리고 짐을 챙겨서 광장에 대기 중인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에 오르기로 한 약속 시간 4시 30분을 어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린아이들처럼 마음 설레는 기대와 함께 모두가 새벽 일찍 눈을 떴을 것이다. 서서히 어스름이 벗겨지기 시작하는 바깥의 공기는 싸늘한 냉기를 머금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불깃을 파고드는 새벽녘의 한기에 일찍 잠을 깼을 것도 같았다.
숙소인 장백산항혜여유도가촌을 출발한 버스는 ‘제1매표소’가 있는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비교적 곧게 뻗어있는 길을 달려 올라간다. 어제 올랐던 길을 다시 한번 오르는 것이다.
우거져 있는 산림은 전나무와 자작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20미터 내외의 높이로 곧게 자란 흰 수피의 자작나무들이 인상적이다. 키 큰 나무 아래쪽엔 버드나무와 사시나무 따위들이 섞여 있다. 드문드문 연둣빛이
감도는 흰색 꽃을 피운 개회나무도 눈에 뜨인다.
해발 1200미터의 높이의 고도. 아직까지는 고산대의 기운을 느끼기는 어렵다. 송강하여유(松江河旅遊)라는 이름의 산장을 지나치며 이어지는 혼합림. 길섶엔 꽃을 피우고 있는 노루오줌(Astilbe rubra Hook.f. & Thomson var. rubra, 범의귀과)이 눈에 들어온다.
숙소를 출발한 지 30여 분만에 버스가 우리를 서문 입구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아직 문이 열려있지 않다. 버스를 내려 현지 산행 안내팀이 마련해서 나누어주는 아침과 점심 두 끼 분의 도시락과 물, 오이 따위의 간식들을 각자의 배낭에 챙겨 넣었다.
꽤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야 서문 출입을 관리하는 직원들이 도착했다. 산행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개별적인 인적 사항이 하나하나씩 점검되고 나서 산문 앞 광장에 들어선 것은 우리가 산문에 도착하고 나서 40여 분이 지난 시각이다. 첫 번째로 출발하는 셔틀버스에 우리 일행을 포함한 사람들을 채우기까지는 또다시 10여 분을 기다려야만 했다. 새벽부터 서둘렀지만, 산문 안의 버스가 백두산 서파 트레킹을 시작하는 곳을 향해 출발한 것은 05시 50분. 탐사 관찰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가질 수 있도록 서둘렀는데, 적지 않은 시간을 노상에서 허비한 셈이다. 드디어 버스가 어제 오후 올랐던 길을 달리기 시작한다.
고산화원을 지나고 나서 10여 분의 거리에 제자하(梯子河)라는 곳이 있다. 버스에서 잠깐 내려 천지에서 연원하는 물길 하나를 지켜보고 다리 건너의 언덕에 자라는 풀꽃들을 볼 수 있다. 다리 아래로는 그리 넓지 않은 물길이 가파른 절벽 아래에 흐르고 있다. 언덕에는 버스 위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여러 종류의 들풀들이 꽃을 피우고 있다. 애기금매화(Trollius japonicus Miq., 미나리아재비과), 털쥐손이, 흰꿩의다리, 바이칼꿩의다리, 화살곰취(Ligularia jamesii (Hemsl.) Kom., 국화과), 지칭개(Hemistepa lyrata Bunge, 국화과), 붓꽃..... 언제인가 내리기 시작한 안개와도 같은 이슬비가 풀꽃들을 함초롬히 적시고 있다. 우리 고장에서는 떡취라고도 부르는 수리취(Synurus deltoides (Aiton) Nakai, 국화과)가 꽤 큰 풀포기를 키우고 있다. 쥐오줌풀(Valeriana fauriei Briq., 마타리과)이 눈에 익다. 우리 고장 영월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풀꽃인데 분홍빛 꽃 송아리가 유난히 화사하다.
버스가 트레킹 기점을 향해 오르는 코스에는 전나무 밀생 지역, 전나무․사스레나무 혼효림, 사스레나무 지역이 이어진다. 제자하를 지나고 나서는 나무들의 숫자가 적어지며 경사진 초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곳부터가 해발 고도 1,700~2,100미터에 걸쳐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수목한계선의 높이가 아닐까 싶다. 이따금 무리를 이루고 있는 사스레나무(Betula ermanii Cham., 자작나무과)들의 모습이 아래쪽에서 보던 나무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자작나무와 흡사한 모습을 띠고 있던 사스레나무는 이제 이곳에서부터는 더이상 훤칠한 키의 신사, 백옥 미인의 모습이 아니다. 키가 움츠러들기 시작한다. 키 작은 뚱보의 모습으로 그 모습으로 점차 변해간다. 마치 벼락을 맞아 허리 위쪽이 잘려져 나간 듯, 주저앉은 모양의 형체를 만들고 있다. 겨울의 모진 추위와 바람에 이렇게 키를 낮추는 것이리라. 길을 오르면 오를수록 사스레나무의 키는 더욱 작아지다가 이내 그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만다.
이제 완만한 경사의 구릉진 언덕은 푸른 초원 일색이다. 지도상에 천지초원(天池草原)이라고 표시된 새로운 지역의 시작이다. 온갖 풀들이 키를 맞춰 자라고 있는데 유독 키를 키운 녀석들이 있다. 흰 꽃 타래를 피워 올리고 있는 박새다. 초원 아래쪽의 박새들은 벌써 꽃을 피우고 있는데 위쪽의 것들은 이제 꽃대를 뽑아 올리고 있다. 그리고 어디쯤에서부터는 박새도 그 모습을 감춘다. 그리고는 이따금 노랑만병초(Rhododendron aureum Georgi, 진달래과)의 노랑 꽃 무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노랑만병초는 진달래과 식물로 설악산이 이들의 남방한계선이지만 국내에서는 보기가 쉽지 않은 꽃이다. 보랏빛 국화꽃 같은 모습의 꽃들은 아마도 이 시기에 꽃을 피운다는 구름국화일 것이다. 신천지와도 같은 푸른 오르막의 언덕은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풀 무리로 가득하다. 노랑만병초, 박새, 금매화, 애기금매화, 큰금매화, 구름국화..... 이미 꽃을 피운 것들도 있지만 무수한 또 다른 풀들이 자신의 꽃차례를 기다리며 이제 막 시작한 이 한 해의 짧은 여름을 서둘러 맞이하고 있다. 버스에서 내려서 무수한 풀꽃들이 어우러져 있는 풀밭 길을 걸어 오르고 싶어지기도 한다.
서파 산문을 빠져나온 뒤 1시간쯤이 지난 6시 50분, 버스는 장백산상점(長白山商店)이라는 큼직한 간판이 걸려 있는 건물 앞의 휑한 언덕바지 공터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이곳이 바로 아침 도시락 식사를 한 뒤 도보로 하게 되는 서파 산행을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아침 도시락은 자그마한 한 쌍의 스티로폴 그릇에 담겨있다. 그릇 하나에는 조밥이 들어있고 다른 하나에는 오징어볶음, 콩장, 김치 따위의 반찬이 담겨있다. 입속의 침을 괴어내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밥을 꼭꼭 씹어 넘긴다. 노란 조밥 맛이 그런대로 괜찮다.
잔뜩 흐린 하늘에 가는 이슬비가 그치지 않는 것을 보면 비는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이런 날씨라면 정상에 올라 천지를 볼 수 있는 행운도 물 건너간 것은 아닐까. 빗발이 더 굵어져 폭우가 내리는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이 마음을 무겁게 만들지만, 발목까지 내려가는 우비를 입고 단단한 채비를 한다.
채비를 마치고 공터 주위의 풀 섶을 살펴보니 여러 가지 풀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있다. 매발톱꽃, 구름국화(Erigeron thunbergii subsp. glabratus (A.Gray) Hara var. glabratus, 국화과), 돌꽃(Rhodiola elongata (Ledeb.) Fisch. & Mey., 돌나물과), 노랑만병초 따위들이 한데에 어우러져 있다. 어느 곳엔 큰오이풀(Sanguisorba stipulata Raf., 장미과) 무리가 지천이다. 가을에 흰색 꽃을 피우는 큰오이풀은 이제 막 다복한 잎새들을 키우기 시작하고 있다. 이토록 큰 무리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니 백두오이풀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곳에는 돌꽃이 녹색 카펫을 깔아놓고 있다. 꽃이 핀 풀 사이사이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여러 종류의 사초류들이 자라고 있다. 풀꽃 못지않게 앙증맞고 귀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