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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우 Apr 27. 2023

[순우의여행노트 14-4] 그 모습을 숨긴 천지

백두산식물탐사기(4)

  7시 30분. 

  오늘의 백두산 서파 트레킹 출발. 

  천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까지 1,206개의 층으로 되어있다는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밋밋한 산허리 구릉을 따라 오르는 길 밖은 끝 간 데 없이 이어지는 초원이다. 풀과 나무, 풀꽃과 나무 꽃들이 고만고만하게 낮은 키로 다투어 자라나고 있다. 이미 수목한계선을 넘어선 고도이지만 노랑만병초, 들쭉나무(Vaccinium uliginosum L., 진달래과), 담자리꽃나무(Dryas octopetala var. asiatica (Nakai) Nakai, 장미과) 따위의 나무들이 풀처럼 키를 낮추어 자라고 있다. 꽃대를 올린 풀꽃보다도 더 낮게 몸을 낮추고 있다. 장미과의 담자리꽃나무는 북부 고산지대의 소관목으로 발에 밟힐 정도로 땅에 깔리고, 잎의 길이도 1센티미터 정도로 작지만 노란 꽃술을 안은 흰 꽃은 지름이 2센티미터 정도로 제법 커서 관상 가치가 높다. 이들은 이미 한창의 시기를 지나 꽃들을 접기 시작하고 있다.  

   

  연이어 나타나는 풀꽃들은 구름국화, 돌꽃, 노랑만병초, 바위구절초(Dendranthema sichotense Tzvelev, 국화과), 두메양귀비(Papaver radicatum var. pseudoradicatum (Kitag.) Kitag., 양귀비과), 개감채(Lloydia serotina (L.) Rchb., 백합과), 애기냉이(Cardamine bellidifolia L., 십자화과), 두메분취(Saussurea tomentosa Kom., 국화과) 따위들이다. 어느 만큼을 오르자 두메자운(Oxytropis anertii Nakai ex Kitag., 콩과)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꽃을 피운 것들도 있다. 곳곳에 매발톱꽃이 갖가지 색깔의 고운 꽃을 피우고 있다. 북동쪽으로 경사가 진 산기슭에는 아직도 잔설이 남아있다. 꾸준하게 내리는 이슬비가 오른편 계곡을 따라 제법 큰 물줄기를 만들어낸다. 이 물이 아래서 보았던 제자하로 흘러내리는 물길의 시작일 것이다.     

구름국화


  산을 오르기 시작하면서 내내 가시지 않는 의문 하나가 있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꽃을 피운 식물들의 모습이 점차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그것이었다. 그런데 2,500미터 높이의 천지가 내려다보이는 지점까지 오르는 동안 쉬지 않고 꽃을 피우는 풀과 나무들을 발견할 수 있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기온이 내려가고 식물들의 생장 환경은 더욱 힘겨워 지지만 한결같이 그들은 싹을 틔우고 꽃대를 올려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각 곳에 자라는 식물들의 종류가 달라지고 같은 종류라 하더라도 그 모습이 변화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같은 구름국화이지만 고도가 높아지면서 그 크기가 점점 작아지고 키도 낮아진다. 제법 키가 큰 두메분취도 표고가 높아지면서 그 키와 잎새의 크기를 점점 더 작게 줄인다. 손바닥만 한 면적의 로제트가 고도가 높아지면서 심지어는 엄지손가락만 한 정도의 작은 크기로 작아진다. 또 높은 고도에 있다고 늦게 꽃을 피우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산 정상 부근에 두메자운, 두메양귀비, 가솔송(Phyllodoce caerulea (L.) Bab., 진달래과), 돌꽃 등이 이미 꽃을 피운 것을 보면 높은 산의 풀꽃들이야말로 더욱 서둘러 먼저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닌가도 싶다. 그러고 보면 함께 꽃을 피우고 있는 제비꽃은 좀 때가 늦은 셈이다. 금매화와 구름국화 사이에 장백제비꽃(Viola biflora L., 제비꽃과)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돌계단 오르막길은 2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는 거리일 듯싶었다. 하지만 여러 차례 길섶에 들어서서 사진기 셔터를 눌러대는데 정신을 빼앗기다 보니 꽤 많은 시간이 걸려서야 천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첫 번째 정상 부근에 도달할 수 있었다. 45분쯤의 시간이 걸렸다.      


  정상에 다다르기까지도 날씨는 좋아지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그치지 않고 내리는 이슬비와 호수 쪽의 짙은 안개가 천지의 모습을 철저하게 가리고 있다. 누군가 선녀가 목욕 중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백 두 번은 올라야 겨우 맑게 갠 산 모습 한번을 볼 수 있다는 백두산. 누군가는 한라산이 남성의 산이라면 백두산은 여성의 산이어서 그 모습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정상 언덕바지 한 곳에는 나라 간의 경계를 긋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넉 자(약 120센티미터)가 될 듯싶은 높이의 회색 화강암 돌기둥 모서리에 ‘中朝境界碑’, 중국과 조선의 경계비라는 한자의 글이 새겨져 있다. 네모난 비석의 양쪽 편으로 동쪽 면에는 ‘조선’, 그 반대편 서쪽 면에는 ‘中國’의 국명이 암각 되어 붉은 페인트를 먹고 있다. 이름하여 ‘5호경계비’, 국경을 말해주고 있는 비석치고는 무척이나 소박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내 땅의 길로 오르고 싶건만 남의 땅 중국의 길을 통해 오를 수밖에 없는 백두산. 산의 최고봉인 2,750미터 높이의 장군봉(將軍峯)이 동편의 지척의 거리에 있지만, 지금은 그쪽 편을 찾아 오를 수가 없다. 궂은 날씨는 우리가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경계비가 있는 이곳에서 우리 22명의 일행은 두 개의 팀으로 나누어졌다. 한 팀은 산 정상의 서북쪽을 향해 발걸음을 계속하게 될 사람들, 그 다른 한 팀은 산 아래 서문 쪽으로 되돌아 내려갈 사람들이다. 13명은 백두산 서편 정상부를 걷는 트레킹에 참여하고 나머지 9명은 아쉬운 하산을 해야만 한다. 트레킹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곳에서부터 약 1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정상 부위의 길을 걸어 북파 쪽 달문에 이르는 산행을 계속하게 된다. 서문 쪽으로 되돌아 내려가는 사람들은 이도백하로부터 시작하여 북파를 오르는 자동차 여행을 하게 된다. 팀을 나누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종주 산행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몇 분의 회원들은 무척이나 아쉬운 발길을 되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중국과 조선의 경계비가 있는 마천우를 오르는 길


  서편의 고봉 백운봉을 향하여  

  8시 25분, 기대의 서파 종주 출발. 

  대열을 새롭게 만든 서파종주팀은 우리 회원 일행과 산악등반 전문 가이드(주종수씨), 길림성 장백산 관리소 안내원, 현지 가이드(최용범씨) 등의 세 사람을 합해 모두 16명이다. 산행은 장백산 관리소 안내원이 앞장을 서고 황대석 회장님이 중간, 김상래 부회장님은 등반대열 말미의 위치에서 이슬비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시작됐다. 능선 아래쪽 시계 거리는 100미터 미만. 천지 안벽의 아래쪽으로는 그 거리가 몇 미터를 넘지 않는다.      


  2,549미터 높이의 마천우(麻天隅) 봉우리를 오른쪽으로 끼고 돌며 위쪽 산허리를 타기 시작했다. 2,500미터 내외 높이의 칼데라 정상 부근의 산 어깨를 따라 북쪽을 향하는 것이다. 마천우 봉우리가 서편으로 흘러내리며 만들어낸 노호배(老虎背), ‘늙은호랑이언덕’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경사진 산머리 길을 나아간다. 가는 실비와 자욱한 비안개 속에 꿈틀거리듯 흘러내린 능선 자락이 아스라하다. 바위구절초, 개미자리(Sagina japonica (Sw.) Ohwi, 석죽과), 구름범의귀(Saxifraga laciniata Nakai & Takeda, 범의귀과), 개감채, 좀참꽃(Rhododendron redowskianum Maxim., 진달래과) 담자리참꽃나무, 노랑만병초 따위의 풀과 나무들이 짜놓은 초록빛 카펫이 끝 간 데 없이 이어져 있다.     


  이렇게 한 시간 여쯤을 돌아 나아가자 서편 쪽에서는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 청석봉(靑石峯)을 올려다볼 수 있는 곳까지 오게 된다. 보이지 않던 바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맑게 갠 날 이 봉우리를 처다보면 발길 옆에 있는 바위처럼 푸른 이끼가 끼어 있을지도 모르는 푸른 바위의 산봉우리를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2,662미터 높이의 청석봉이 있는 곳부터는 가팔라진 산허리를 끼고 돌 수는 없기에 발길을 아래쪽으로 돌려야만 한다. 발아래 놓여 있는 큰 계곡을 건너야만 하는 것이다. 산허리를 사선으로 타며 아래쪽으로 다시 내려가는 길을 걸어야한다.

마천우에서 청석봉까지


  한 시간 여쯤의 내리막 후에 당도한 계곡을 따라서는 시원한 물길이 나 있다. 장마가 그친 뒤 흘러내리는 산골 물 마냥 뽀얀 색깔의 물은 무척이나 차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손으로 물을 떠서 목을 축인다. 물맛이 좋다. 보통의 산 도랑에서 받아 마시는 건수의 물맛보다 그 맛이 야물다. 손이 시리도록 차갑기 때문일까? 경쾌하게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귀를 시원하게 한다.      


  계곡 가의 돌과 바위 위에 걸터앉아 배낭에 넣어온 오이, 초콜릿, 비스킷 따위로 간식을 했다. 이제 중국 쪽에서는 가장 높은 봉우리인 백운봉(白雲峯)을 향해 계곡 반대편의 산기슭을 타고 올라야만 한다. 2,500미터의 고도에서 1,800미터의 계곡 아래로 내려왔으니 2,600여 미터 높이의 백운봉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제 다시 수직 거리로 800여 미터의 높이를 올라야 한다. 줄곧 두 시간 동안을 걸어 올라야 한다. 간식으로 원기를 회복하면서 우리는 모두 마음가짐을 새롭게 했다. (2007.7.2.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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