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0 기다림은 일찍 눈을 뜨게 만든다. 눈을 뜨자마자 선실에서 나와 조타실로 올라갔다. 아직은 배의 출항 여부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바람기가 있다. 그런데 비바람보다도 안개가 더 문제라고 한다. 안개주의보가 내렸다고 한다. 주점이 즐비한 거리를 걸어 식당을 찾아 나섰다. 어제저녁 식사를 한 곳에서 국밥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07:50 배가 뜨지 못한다고 한다. 비가 그렇게 많이 내리는 것도 바람이 그리 거칠지도 않은데 안개가 문제라고 한다. 안개주의보가 해제될 가능성은 아주 낮다고 한다. 혹이나 하는 기대를 아주 버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하루를 섬에서 보낼 궁리를 해야 했다. 혹 출항 소식이 전해질 수 있으니 부두로부터 멀리 떠날 수도 없다. 부둣가 한쪽 길을 걸어 창고가 있는 곳까지 갔다. 그 너머는 황량한 바다뿐이다. 반대쪽으로 방향을 돌려 주점과 난전이 몰려 있는 거리를 지나 드문 민가마저 끝이 난 곳까지 걸었다. 단조로운 풍경에다가 황량한 느낌이 드는 건 매한가지, 그쳤던 비가 다시 시작된 때문에 더는 걷기를 계속할 수도 없었다.
11:00 한낮에도 느껴지는 고요와 어둑함, 궂은 날씨가 음울함을 느끼게 한다. 기약 없는 기다림의 시간은 무기력과 권태감을 더해준다. 누군가가 낚시를 권해주었지만, 낮 동안은 바닷물이 차오르는 만조의 시간이라 늦은 오후까지 기다려야만 한다고 한다. 물이 빠졌을 때 갯지렁이를 잡았어야 했는데 이미 물이 차올라서 미끼를 잡으러 바닷가로 나갈 수도 없다.
14:00 점심 식사 후 이곳저곳을 배회하다가 ‘여수돌산상회’라는 상점엘 들렀다. 여러 가지 잡화와 과일을 파는 구멍가게다. 손님이라고는 없는 그 점방에서 주전부리를 조금 산 뒤에 낡은 의자에 걸터앉아 점방의 여주인이 흑산도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사연을 들었다. 뭍에서의 사업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섬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이야기부터 뭍의 고등학교로 진학한 아들의 이야기까지... 저녁과 아침의 식사를 그 집에서 먹는다면 방값은 받지 않겠단다. 파도 소리에 잠을 설쳤던 선실에서의 밤을 떠올리며 얼씨구나 그 집 골방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낚시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에 바닷가로 나갔다. 하지만 아직도 물이 가득한 바다에서 갯지렁이를 잡을 수도 낚시터를 찾기도 어려웠다. 빈둥거림으로 온종일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목포 귀항
06:00 역시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어제 오후 점방의 골방으로 짐을 옮기기 위해서 배에 올랐을 때 사무장도 기관사도 아닌 선원 한 분이 툭 던지는 얘기를 들었다. “내일은 웬만하면 배가 뜰 겁니다.” 선원의 말은 사람도 화물도 하루가 밀렸으니 다소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배가 출항할 것이란 현장의 소리였다. 오랜 경험을 통한 날씨의 흐름을 보고 내린 판단인지도 몰랐다. 배로 달려가 출항 여부를 물어보니 8시에 출항할 거란다. 야호~ 다행이 아닐 수 없다.
08:00 귀항(歸港)을 위한 출항(出港)과 귀항(歸航). 서둘러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배에 올랐다.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배 앞에는 작은 탁자를 놓은 사무원이 표를 끊어주고 있었다. 반갑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배에 올랐었다. 비안개가 아득한 바다를 가르고 배가 차례로 사흘 전 흑산도를 향하며 들렀던 섬을 역으로 다시 들리며 사람을 태우고 짐을 실은 뒤 항해를 계속한다. 아득함 외에는 시야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 배는 도초도와 안좌도를 들러 목적지이자 모항인 목포를 향한다.
15:00 목포 귀항(歸港).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바닷길이 끝났다. 7시간의 시간이 걸렸다. 순항했다면 6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을 길이 해무와 안개비 속에서의 조심스러운 항해라 1시간의 시간이 더 걸린 것이다. 이제 광주로 가서 고향길에 오를 것이다. 밤 기차로 서울로 되돌아가 다시 중앙선 기차를 타고 원주를 향해야 한다. 바다와 섬의 풍경이 꿈만 같기도 했지만, 기다림만으로 꼬박 하루 하룻밤을 보냈던 섬에서의 시간을 뒤에 두고 나는 남도 뭍에서의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1974.7.4.)
[후기(後記)]
1757년에 쓰인『여지도서(輿地圖書)』라는 지리서에 따르면 흑산도는 서울 도성에서 뱃길로 900리(약 360km), 섬 둘레가 135리(약 54km), 283호의 집에 남자 361명, 여자 344명 모두 710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흑산도는 그 면적이 20㎢, 해안선의 길이는 59.8km, 가장 높은 산의 높이는 345m, 모두 100여 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구성된 흑산도 권역에 지금은 1,100여 가구에 2,200명쯤의 사람이 살고 있다.
흑산도 전경(자료: 한국관광공사)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태풍에 갇혀 섬에 발이 묶여있었던 하루의 낮 동안 섬의 어딘가를 찾아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날이 좋아지면 혹이나 배가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에서 부두를 벗어나서 어딘가 다른 곳으로 멀리 가기는 어려웠다. 아마도 흑산도에 대한 나름의 여행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일찌감치 출항을 포기하고 섬 여행에 나설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흑산도는 하나의 경유지일 뿐 여행지로서는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흑산도에 대해서 내가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만큼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틀 밤과 온이 하룻낮을 머물며 아무런 계획 없이 지낸 흑산도에서의 시간, 그것은 호기심이나 그리움이 아닌 오로지 기다람의 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간 동안에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가 그곳의 토박이가 아닌 뭍에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었던 듯싶다. 즐비한 주점은 물론 한두 곳의 다방, 가물에 콩 나듯 숨어 있는 상점의 사람들 모두가 뭍사람들이었던 듯하다. 그들에게 흑산도의 역사와 문화 따위에 대한 것을 물어서 그들에게서 알아낼 건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제주를 빼고는 육지로부터 가장 먼 절해고도의 유배지 정도로만 알려졌던 흑산도는 아무런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곳이다. 여행객들은 목적지 홍도만을 생각했지, 홍도를 가고 오는 과정, 흑산도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당시 그곳에서 무턱대고 귀항을 위한 출항만을 기다리던 우리는 흑산도에서 그 무엇인가를 찾아보고자 하는 생각이나 노력 조차를 해보지 않았다.
섬에는 섬사람, 그리고 뭍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산다. 뭍에서 온 사람은 스스로 섬을 찾아든 사람도 있지만 쫓겨온 사람도, 오도 가도 못 하게 갇힌 사람도 있었다. 섬사람은 섬사람대로, 스스로 온 사람이나 쫓겨 온 사람도 그런대로 이 섬에서 살아간다. 또 섬을 다시 떠나고 싶은 이들은 다시 떠나도 간다. 하지만 이 섬에는 그들의 고향과 가족을 떠나 그 누구보다도 더 절망하는가 하면 소망하면서 아프고 외로운 삶을 살았던 이들이 있었다. 이 절해고도의 섬에 홀 홀 단신 유배를 당했던 사람들이다. 강제로 유폐되었던 이들 중에는 섬을 떠나지 못하고 이 땅에서 숨을 거둔 이도 있다. 삭이지 못한 한과 절절한 그리움을 남겨두고 떠난 이들의 원혼이 이 음험하고 암울하기도 했던 검은 섬 흑산 어딘가에 아직도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다. 내가 흑산도에 발이 묶여있던 때가 지금으로부터 어언 50년, 강산이 다섯 번이나 변했던 시간이다. 그 시간의 길이만큼이나 섬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뭍에서 온 사람들의 수심 어린 얼굴이 더 많았던, 물웅덩이가 흙탕물을 튕기던 장마철의 질퍽한 길바닥은 깔끔하게 포장되고, 후줄근하기만 하던 모습의 선창과 노점은 깔끔한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섬 곳곳으로 도로가 뚫리고 그 길로 마을과 마을이 이어졌다. 거친 파도와 험준한 벼랑의 해안을 가진 흑산도는 1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50여 km에 이르는 해안 길을 연이어 달릴 수 없었다. 1994년에 착공된 흑산도 일주도로가 2010년에 완공되어 섬의 해안 길이 하나로 이어졌다.
상라산에서 본 흑산도 일몰(자료; 동아일보)
한편 시간이 흐르면서 흑산도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통일 신라 중기 장보고의 청해진과 당나라의 중간 기항지이기도 했던 흑산도는 오랜 세월 최변방의 섬으로 묻혀 있었지만, 검은 묵의 향기와도 같은 역사와 문화의 숨결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섬에 유폐되어 억지의 삶을 살다 죽어간 이들의 유혼(幽魂)이 되살아난 것일까? 특히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이곳에 유배되었던 정약전이라는 인물을 소재로 한 역사의 이야기가 ‘하늘과 바다의 땅’ 흑산도를 배경으로 하는 일련의 소설로 형상화되었다. 2005년 한승원의 소설『흑산도 하늘길』, 2011년에는 김훈의 소설『黑山』, 이듬해에는 오세영의 『소설 자산어보』가 출간되었다. 그리고 2021년에는 이준익이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 이 이야기를 담은 영화『자산어보』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흑산도가 품고 있었던 깊은 애환과 질곡의 삶에 대한 깊은 관심과 큰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에서 지역사회에서는 흑산도의 매우 특별한 유산으로 기록된 유배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시작된 그 노력은 「유배문화공원」의 조성과 「자산어보원」의 건립과 같은 문화 공간의 구축으로 구체화되었다. 외적으로부터 섬을 방위하기 위하여 축조했다는 상라산성 등의 유적도 확인되었다. 홍도를 여행하는 사람들의 배가 잠시 기착하는 곳 정도로만 알았던 검은 산의 섬 흑산도(黑山島)는 치열한 삶의 애환과 독특한 역사와 문화의 향기가 흘러넘치는 곳으로 새롭게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어둡고 음산했던 검은색의 섬 흑산(黑山)은 이제 거친 역사의 숨결과 독특한 문화의 향기가 그윽하게 살아있는 검은 자색(玆色)의 섬, 자산(玆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黑山 또는 玆山 모두 다 같이 ‘검은 산’이라는 뜻의 이름이지만, 소설가 김훈은 그의 소설 『黑山』에서 “‘자玆’는 흐리고 어둡고 깊다는 뜻이다. ‘흑黑’은 너무 캄캄하다. ‘玆’는 또, 지금, 이제, 여기라는 뜻도 있으니 좋지 않으냐. 너와 내기 지금 여기에서 사는 섬이 자산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모든 상실, 한없는 절망과 아픔의 삶을 살았던 사람도 이 검고 음험한 섬 흑산을 지금 여기 그가 사는 섬 자산이라고 고쳐 불렀다. 검다는 같은 뜻을 지니는 흑산과 자산 중에서 흑산보다는 자신이라는 이름이 내게는 더 좋게 느껴진다.
이렇듯 무척이나 오래전이지만 이틀 밤과 하루낮 나의 발을 묶였던 흑산도는 내가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고, 또 많은 것이 달라진 듯하다. 그 섬의 모습을 새로운 눈길로 한번 봐보고 싶다. 하기야 사람 누구나 외로움이 느껴질 때 우리 각자는 모두가 하나의 섬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섬이라면 그게 바로 홍도나 흑산도 같은 섬이 아닐까? 나의 홍도 배낭여행 50주년이 되는 내년에는 며칠의 일정을 잡아서 홍도와 흑산도로 떠나는 새로운 여행을 다녀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3.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