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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우 Jan 24. 2023

[순우의 여행노트 4] 정동진 아침 풍경

  정동진 해돋이. 하지만 해돋이만이 정동진(正東津)의 전부는 아니다.

     

  정동진에는 바다와 수평선이 있고 푸른 파도와 흰 모래밭, 그 모래언덕에 부딪히는 파도의 하얀 부서짐이 있다. 길게 펼쳐진 해안선이 끝나는 곳, 그리고 정동진역 기차가 멈춰서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 철길 너머엔 해송(海松)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작은 산 숲도 있다.

     

  또 정동진에는 신새벽 어느 곳으로부터인가 몰려오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태고(太古)의 빛으로 떠오르는 새로운 해를 바라보는 설렘과 기다림, 즐거움과 환호가 있고, 모래밭 위에는 그 많은 사람의 수보다도 훨씬 더 많은 발자국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곳엔 모래밭 위 발자국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오감, 만남과 헤어짐, 모임과 흩어짐이 있다. 그리고는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모래언덕 위에 휑하니 자리해있는 기차역에 얼마 전에 쏟아놓았던 사람들을 다시금 싣고 떠나는 기차도 있다.


  이른 아침 한때 어스름 속에서 조용한 술렁거림을 만들고 차가운 바닷바람을 인내하며 따뜻한 입김을 불어내던 사람들의 무리가 흩어지고 나면 바닷가에는 언제나 같이 정처 없이 부는 바람과 처연한 파도의 밀림 소리가 더 큰 여적(餘滴)으로 남겨진다. 장엄한 일출이 있었던 날의 아침에는 더욱 더 선연한 여적으로...

 

정덩진 해돋이 광경(자료: https://yollstory.com)

    

  여명(黎明)이 사라지기 전까지 먼바다 위에서 밝은 집어등(集魚燈)으로 휘황하게 빛나던 고깃배들이 이제는 일렁이는 큰 파도에 밀려 보일까 말까 하는 작은 자취만을 남겨두고 있다. 다만, 큰 변함이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닷가 모래언덕 위에 솟아있는 가파른 산자락을 짙푸르게 감싸며 붙박여 있는 소나무 무리의 모습이다. 그들은 수십 년,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세찬 바닷바람을 마주하며 가파른 바위 벼랑을 부여잡고 그곳에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 바다마을 쪽을 내다보는 나무들은 이 마을을 지나가는 시간을 빠짐없이 지켜보았을 것이다.     


  정동진에는 이렇게 떠나는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남겨진 것들이 있지만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버린 것들도 있다. 너른 모래펄을 가로질러 이리저리 뛰놀던 시골 아이들의 뜀박질과 해맑은 웃음소리가 사라져버린 듯하다. 어린이들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어린이들과 동무하러 얕은 바닷물 모래밭으로 기어 나오던 조개들도 그 모습을 감추어버린 것만 같다. 바다와 모래밭을 넘나들며 머리 위 하늘 높이 공중제비하던 바닷새들도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듯했다.   

  

  그런가 하면 하루 한 번씩 몰려왔다가 다시 흩어져서 되돌아가는 도시 사람들의 부산한 발걸음과 건조한 체취가 소금기 눅진한 포구(浦口)의 내음을 앗아가 버린 것 같다. 비릿한 오징어 냄새, 풋풋한 미역 냄새가 배어있을 마을의 난전과 조가비 장식 따위가 즐비해야 할 마을 모퉁이의 상점은 유리 또는 크리스털로 만든 모래시계 따위의 낯선 상품들로 가득 차 있다.

     

  무엇보다도 거의 완벽하게 사라져버린 건 아마도 옛 모습의 소담한 어촌 풍경과 투박하지만 순박하고, 억척스럽지만 꾸밈없던 바닷가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조용한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솟아오르던 초가집과 돌담으로 이어지던 마을 길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높은 콘크리트 건물, 그 많은 모텔과 민박집, 식당과 찻집, 노래연습장과 컴퓨터게임방, 비디오방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해돋이 명소로 이름이 나지 않았다면 아주 작은 무인역의 하나로 하루 종일 한산하기 짝이 없었을 정동진역에는 역사보다도 더 큰 화장실이 들어섰고, 차표를 파는 역무원보다도 바닷가로 들어가는 해맞이 손님의 입장권을 파는 이의 손길이 더욱 바쁘다.


  지난 1월 하순 어느 토요일의 이른 아침, 200여 킬로미터의 새벽길을 달려왔지만, 그곳 정동진의 바닷가에서는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장엄하게 떠오르는 해는 맞이할 수 없었다. 7시 반쯤이면 찬란하게 솟아올랐어야 할 아침 해는 수평선 아래쪽으로 짙게 드리운 안개구름 뒤로 슬그머니 숨어버렸다. 떠오른 해가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수평선 위쪽으로 한참 올라간 곳에 있었고 이미 아침의 짙붉은 노을과 새 빛의 기운을 모두 떨쳐내고 백주의 태양처럼 창백하고 작아진 뒤였다.


고성산에서 바라본 정동진역 풍경(자료: https://m.blog.naver.com/iamromy)


  한결같이 간절한 바람으로 바다를 응시하던 그 많던 눈망울들은 이내 고단했던 무겁고 축축한 발길을 되돌려 서둘러 바닷가 모래밭을 빠져나갔다. 어떤 이들은 곧바로 줄지어 세워둔 승용차를 타고, 또 다른 이들은 8시가 얼마쯤 지난 시각에 정동진역을 떠나 남녘을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사라져 잊히어진 것들이 많은 만큼 더욱 새로워진 것들이 많아진 정동진 바다마을. 그러나 해돋이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정동진은 그 옛날의 작은 포구의 마을보다도 더 한산해지는 것만 같다. 그것이 불타는듯한 광휘의 일출이든, 아니면 한 줄기의 햇빛도 맞이할 수 없는 비구름 속의 잃어버린 일출이건 해가 떠오르고 나면,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안에 거의 모든 사람이 떠나고 정동진은 마치 늦은 오후나 저녁과도 같은 깊은 정적과 고요가 깃든다.


  더욱 쓸쓸해 보이는 포구의 거리. 일출을 지켜본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면 더욱 허전해 뵈는 바닷가 모래밭의 모습. 바닷새들의 분주한 비상과 지저귐 소리, 왁자하게 들려와야 할 어린아이들의 외침 소리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바다마을의 풍경은 낯설 만큼 한가롭게 느껴진다. 정동진은 이제 더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체취와 숨결이 고즈넉하게 살아 숨 쉬는 정겨운 바다마을이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정동진에는 오랜 세월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한 조각의 풍경이 있다. 모래밭이 가까운 바다마을 한가운데 다복하게 솟아있는 솔숲 고성산(高城山)이다.


고성산 소나무 사이로 바라본 바라본 바다 풍경(자료: https://hee-ha.tistory.com)


  소나무가 작은 동산 전체를 감싸고 있는 고성산(높이: 57.2m)에 오르면 나뭇가지 사이의 환한 틈새 아래로 내다보이는 바다와 모래밭, 부서지는 파도는 모든 것들을 오래전에 있던 그대로의 느낌으로 되찾게 해준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해맞이하는 사람들의 발길로 부산했던 바닷가의 모래밭은 밝은 햇빛에 새하얗게 반짝이고 성긴 솔가지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쪽빛 바다 물결 속에는 푸른 숲의 그늘이 옥색과 에메랄드빛 일렁임으로 출렁거린다. 바다와 모래사장, 숲과 파도가 한데서 서로 만나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없는 동해의 거친 기운을 느끼게 하고 한결같이 푸르른 모습을 보여 준다.

    

  마음속에 담고 있던 작은 바다마을에 대한 그리움과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바뀌어버린 정동진. 그러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작고 야트막한 고성산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과 끊임없이 몰려오는 파도, 그 거친 파도에도 다 깎이지 않은 바위벽, 영겁을 함께했을 모래밭의 무수한 모래알, 무성한 솔숲과 함께 그곳을 지키고 있다. 찝찔한 소금 내음이 느껴지는 바닷바람이 가파른 벼랑을 두텁게 감싸고 있는 소나무 숲속으로 불어온다. (2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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