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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우 Jan 31. 2023

[순우의 여행노트 5] 솔숲이 있는 영일대 풍경

  안자락 바다를 아늑하게 안고 있던 옛 영일대의 동촌마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소담한 숲을 이루고 있던 해송(海松)의 무리와 함께 영일만(迎日灣)의 잔잔한 바다를 따라 길게 놓여있던 하얀 모래밭, 눈이 부신 햇살과 깊은 나무숲에 안겨 보이지 않을 듯, 멀리서 보면 어렴풋하게 자리하여 있었을 ‘동촌(東村)’이라는 이름의 바다마을은 지도상에서 그 자취를 감추어버린 지 오래다. 30여 년 전 마을의 어귀에서 그 마을을 지키고 있던 느티나무 당산목이 불도저의 삽날에 받혀 쓰러지던 날 이후, 그 마을은 그곳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마저 깨끗하게 지워질 만큼 완벽하게 변해버렸다. 그 푸르던 그곳 해송의 솔숲도 자취를 감췄다.

     

  그때의 솔숲은 바닷가 고기잡이 마을과 육지의 벌판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 경계로부터 얼마쯤인가 펼쳐져 있던 제법 넓은 평야는 지금의 영일대(迎日臺)와 포항제철소의 배후를 이루고 있는 완만한 언덕의 또 다른 솔숲으로 이어져 있었다. 포항제철(POSCO)의 역사를 기록한 책 속에는 사라진 그 솔숲의 모습이 남아있다. 그 책 속에 담긴 한 장의 빛바랜 흑백사진은 이곳 영일만에 제철소가 들어서기 전의 드넓은 바다와 그 바닷가 외진 마을의 한가롭기 그지없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제철소 건설 이전의 동촌마을 전경(1967년, 자료: 포항제철 30년사)

  참으로 오랜 세월을 그 사진의 모습처럼 변함이 없었던 이 바닷가 동촌마을은 어느 날 하루아침에 그야말로 경천지동(驚天地動)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마을의 당산목이 뽑혀나간 곳으로부터는 제철소의 중앙도로가 뚫리고 그 길가에는 아주 새로운 수종의 사이프러스 삼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졌다. 길고 넓었던 모래밭과 해송 숲 뒤쪽의 넓은 평야는 골라지고 다져져서 거대한 굴뚝의 공장이 세워지고 수많은 건물이 들어섰다. 아득하리만치 먼 바닷가 모래톱을 따라서는 파도를 막는 방파제와 큰 배들이 닻을 내리는 항구가 만들어졌다. 불과 반세기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이토록 큰 변화가 이루어지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이른바 1960년대에 시작된 ‘개발(開發)’이라는 이름의 변화가 바로 그런 신화와도 같은 개벽을 만들어냈다. 사진으로만 보면 근대의 문명으로부터는 멀리 동떨어져서 있던, 정겹게만 느껴지던 조용한 바다마을이 우리나라 산업 입국의 토대가 된 철강 산업의 메카로 완전히 탈바꿈한 것이다. ‘영일군 대송면 동촌동(迎日郡 大松面 東村洞)’이라고 불렸던 바닷가 마을 하나가 단위 제철소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철강 산업의 터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이곳의 모습과 풍경, 이곳 사람들과 그들의 삶, 그 땅과 바다를 그린 지도... 그 모든 것들이 모두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하지만 이렇듯 그 어떤 누구도 몰라보리만치 변화된 이 영일만 포구의 강산에서도 끊이지 않고 살아 숨 쉬는 아름다운 자연의 숨결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오붓하게 푸르른 언덕을 만들고 있는 영일대 일대의 솔숲이다. 제철소 건설 초창기 외국인 숙소가 자리해 있던 곳이다. 허허벌판이던 그곳에 숙소가 건설되고 동촌마을에서 뽑힌 소나무들을 옮겨심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솔숲은 그곳 앞쪽의 바닷가 마을과 모래밭이 모두 사라지고 완전히 다른 세상이 새롭게 태어나는 모습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동촌마을에서 사라진 솔숲을 대신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호텔영일대 풍경(자료: 호텔영일대)

  지난 늦가을 업무차 제철소를 방문하고 하루의 여장을 풀었던 영일대 호텔은 그야말로 아늑하고 포근한 자연 속의 공간이었다. 그곳은 거대한 기계장치와 뜨거운 불덩어리로 한껏 고조된 긴장감마저 느끼게 했던 제철소 안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호텔 주변과 솔숲을 이어주는 오솔길이 삽상하니 호젓했다. 영일대의 울창한 소나무 숲은 개발이라는 현대 산업사회의 필요악적인 산물과 철강 산업이라는 이른바 ‘굴뚝 산업’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측면의 이미지를 말끔하게 씻어줄 수 있을 만큼 다르다. 인위적인 개발의 산물과 숲이라는 자연 유산의 조화로운 어우러짐, 그리고 개발과 함께 갈 수 있는 우리의 아름다운 자연과 건강한 삶의 환경. 영일대의 검푸른 솔숲은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영일대에서 눈에 띄었던 또 다른 아주 작은 풍경의 하나는 영일대 호텔 앞뜰에서 젊게 자라고 있는 한그루의 소나무였다. 그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일관 제철공장인 그곳의 포항제철 제1기 설비 착공식이 있었던 날 바로 그곳에 기념 식수로 심어진 한 그루 오엽송(五葉松) 소나무였다. 제철소대로가 달리는 곳 어디쯤엔가 서 있던 당산나무가 뿌리째 뽑혀나간 뒤, 그것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영일대 앞뜰에 정성스레 심어진 나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러 개의 가지런한 층을 만들며 마디게 자라고 있는 이 나무 또한 건강한 숨결로 이곳의 흘러간 역사를 생생하게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1970년 4월 1일’이라는 날짜가 새겨진 나무 앞의 표석에는 동촌마을의 당산목과 숲은 사라졌지만, 영일대의 이 솔숲만큼은 반드시 지켜나가야 한다는 분명한 의미가 새겨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71년에 식수된 영일대 앞 정원 오엽송(자료: 경북일보)

  이른 아침에 일어나 걷는 영일대 솔숲 오솔길의 공기는 맑고 상쾌하기만 했다. 동편 바닷가에서 떠오른 아침 해의 화사한 빛은 숲속으로 비껴들어 짙푸른 소나무들의 색조를 더욱 청량한 기분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제철소의 산보다도 더 높은 제강 타워, 냉각탑과는 달리 나무 높이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2층 구조의 영일대 호텔 건물은 주위를 소복하게 감싸고 있는 소나무 숲에 포근하게 안겨있는 느낌이었다. 마치 사라져버린 동촌마을의 야트막한 초가집들이 해송의 무리 속에 말없이 조용하게 안겨있듯이 말이다.


  가까운 바다마을에 길게 펼쳐졌던 해풍을 막아주는 숲과 흰 모래사장은 모두 사라졌지만, 영일대의 솔숲은 지금도 더욱 깊고 두텁게 자라나서 먼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맞이한다. 앞만 보고 내달렸던 그 숨 가빴던 변화와 개발, 이른바 근대화의 시기를 잘 견뎌내고 살아남아 기품이 있는 공간으로 우리 곁을 지켜주고 있다. 그 숲은 푸르고 아름다운 품을 벌려 나를 안아주고 어떤 안도감과도 같은 것을 느끼게도 해준다. 바로 이 순간에도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온통 파헤쳐지고 있는 우리 강산 여러 곳의 헐벗은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영일대의 건강한 솔숲 풍경을 떠올리게 되면 그래도 한 가닥 작지 않은 마음의 위안을 받게도 된다. (2003.12.)        

영일대 호수 풍경(자료: 호텔영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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