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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우 Feb 07. 2023

[순우의 여행노트 6] 늦가을 제주의 색깔

늦가을 제주 완상(1)

     

  1     

  아주 늦은 가을의 제주지만 아직 푸른 색감의 모습이 많이 남아있다. 소철, 동백, 사철나무 등이 사계절 그 푸르름을 잃지 않는 고장 제주(濟州). 오는 겨울의 색깔도 크게 더 거칠고 황량해지지는 않으리라. 공항에서 제주 시내로 들어오는 길에서 본 제주의 모습이 자못 인상적이다.     

 

  완만한 능선이 여유 있게 천천히 흘러내린 한라산(漢拏山)의 우람한 자태를 뒤로 둔 제주의 도시가 그 산자락 아래 포근히 싸여있다. 시내를 지나치는 갓길의 화단에는 꽃을 피우는 것도 더러 보인다. 서양 앵초를 닮은 꽃도, 코스모스와 비슷한 모습의 꽃도 있다. 아내는 벌개미취 꽃이 핀 것을 보았다고도 했다. 남도의 섬은 역시 다른 모습이다.  

   

  다른 도시에서는 흔하게 보이는 고층의 아파트 단지도 눈에 띄지 않고, 시야를 흐트러뜨리는 높은 키의 빌딩도 없이 모두가 야트막하다. 제멋대로 뻗어 나가며 키를 키우는 도시가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관광 제주’라는 기치를 들고 아름다움을 가꿔나가고 있는 도시이기에 이루어지고 있는 나름의 노력 때문이리라.

제주시 뒤로 솟아있는 한라산(자료: 네이버)

2     

  서귀포를 향하는 516도로 주변의 풍경은 크게 서너 가지의 색깔로 나누어지는 듯하다. 동백과 사철나무, 잣나무와 소나무의 중간 모습을 한 해송, 삼나무의 무거운 초록, 잎새를 지운 나무와 숲이 만드는 짙은 갈색, 가을걷이가 끝난 밭떼기의 화산석 돌담과 황갈색의 밭 자락,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빈터와 오름에 어김없이 일렁이는 억새의 회갈색 물결...


  문득 솟아 있는 오름 주변의 억새 무리가 무성하다. 버스가 서귀포 해안 쪽으로 들어서서 달리기 시작하자 곳곳의 과수원 나뭇잎 사이로 샛노란 열매가 가득하다. 그 크기로 보아서는 보통의 귤보다는 좀 더 커 보인다. 언덕 위로 오를 때면, 바다 쪽이 가까워질 때면 차가워 보이는 푸른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새삼 바다가 있는 섬이라는 걸 실감한다.  

화산석 돌담이 둘러진 받뙈기(자료: 네이버)

   3

  오후 5시쯤에 서귀포 서편 중문단지의 호텔에 도착했다. 오전 안개로 비행기가 1시간여 지연 출발한 때문에 예정보다 늦게 도착한 것이다. 벼랑 진 해변에 지었다는 호텔은 육지 쪽에서 들어오는 로비가 건물의 8층 높이에 있고, 4층에 있는 방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 독특한 구조다. 바다를 향하는 방의 앞쪽은 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숲이 바다까지 이어져 있다. 팔을 벌린 나무들이 내려다보이고 숲 사이사이 오솔길이 나 있다. 목련 따위의 활엽수들은 잎을 지웠지만, 동백, 사철나무 따위의 나무들은 여전히 푸르다.

    

  짐을 풀자마자 바닷가 숲길 산책에 나섰다. 서편의 낙조가 아름답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산책을 시작하는 바닷가 오솔길에는 벌써 어스름이 내리고 있다. 길섶에 심어진 관목들이 찔레와도 같은 빨간 열매를 달고 있다. 산책로를 따라 심어진 철쭉도 다홍, 진홍의 단풍을 물들이고 있다. 해변의 숲에는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다. 6시가 채 되지 않았지만 해는 이미 바다 너머로 떨어졌다. 붉은 노을빛 낙조가 먼바다에 조금 남아있을 뿐 바다는 검푸른 빛으로 가라앉았다.

      

  금세 어두워진 숲속 풍차의 집 ‘Windmill Lounge’에 밝혀진 5색 불빛이 화려하다. 오색 등을 단 풍차가 천천히 돌고 있다. 숲의 색깔은 더욱 검어지고 호수정원 주위에 켜진 파란 불빛의 등들이 멋진 야경을 연출해 낸다. 남국의 빛과도 같은 색깔이다. 어디론가 낯선 곳으로 참으로 멀리 떠나온 느낌이다.

중문 앞바다 석달해변의 석양(자료: 네이버)

4     

  저녁은 포구의 정취를 느껴보기로 했다. 오래전에 들렸던 적이 있는 서귀포 포구 어시장을 이야기했지만, 택시기사는 화순항이나 대포를 가는 게 더 좋을 거라 한다. 가까운 거리인 대포로 가기로 하고 바닷가를 달렸다. 밤바다는 그저 어두웠다. 휘황한 불빛의 몇몇 간판 중에서 ‘대포원조회집’이라는 곳을 찾아들었다. 서귀포 포구 식당에서 맛보았던 다금바리가 메뉴에 올라있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다. 매운탕으로 맛있게 먹었던 농어는 봄이 돼야 맛볼 수 있단다. 다금바리의 절반 값인 대포 지역의 고유 어종이라는 흑돔과 따돔이란 것을 주문했다. 제주 특산 전복이라는 오분작 구이 등 특이한 밑반찬이 푸짐하게 상에 올라왔다. 그 색깔보다는 바다 내음이 물씬한 저녁상이 그득해졌다.

      

  12월의 마지막 달을 앞두고 호텔 로비에 멋진 장식의 크리스마스트리가 점등됐다. 로비 라운지에서 피아노 4중주단의 선율이 들려온다. 러시아 남녀 혼성으로 구성된 악단, 한 남성이 클라리넷을 불고 세 여성이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를 각각 연주한다. 역시 음악은 생음악의 선율로 들어야 제맛이다. 크리스마스트리, 샹들리에, 악기를 연주하는 세 여성의 머릿결은 금발, 모두 노란색이다. 나는 스미르노프 보드카로 만든 블랙 러시안을, 아내는 코코넛 쥬스 색깔의 진 칵테일 마거리트를 주문했다. 귀에 익은 감미로운 선율 뒤에 우리의 대중가요 ‘잊혀진 계절’의 연주가 이어진다. 다채로웠던 하루 제주에서의 밤이 깊어져 간다. (2002.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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