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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우 Feb 14. 2023

[순우의 여행노트 7] 아침 산책과 노변 풍경

늦가을 제주 완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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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곳에서의 아침은 더 새롭다. 긴 아침 산책을 했다. 신화가 깃들어 있다는 화산호반(火山湖畔)을 출발, 풍차라운지가 있는 목책 길을 걸었다. 마치 숲 속을 걷는 기분. 억새가 있는 바닷가 언덕으로 나왔다. 소나무 사이로 내다보이는 하얀 모래밭이 긴 호(弧)를 그린 해안선, 그리고 넓고 푸른 바다. 유난히 밝고 맑은 아침이다. 하지만 잔잔한 물결에 떨어져 아주 잘게 부서지는 무수한 햇살의 조각이 수평선을 교란한다. 수평선이 뽀얀 해보라 속에 숨어버렸다. 전망대가 있는 좀 더 높은 언덕으로 올라 다시 한번 남서쪽으로 트인 바다와 아스라이 뻗어 나간 해안선을 굽어본다. 땅과 너른 바다, 바다, 바다... 모래밭이 끝나는 바닷가부터는 가파른 언덕과 벼랑 위의 숲이 서쪽 땅끝 멀리까지 이어진다.

숙소에서 바다쪽으로 보이는 이른 아침 풍경(자료: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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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되돌아오면서 풀과 꽃, 나무들을 눈여겨 살펴본다. 한결같은 기상을 뽐내는 해송(海松), 꽃망울을 키우는 동백(冬柏)과 유도화, 연둣빛 씨앗 주머니를 달고 주황의 씨앗을 토해내고 있는 사철나무, 새빨간 잎자루를 가진 굴거리나무 따위가 대중없이 무리를 이룬다. 길섶에 해국(海菊)이 선연한 연보랏빛 꽃을 피웠다. 꽃의 모양이나 색깔은 벌개미취나 쑥부쟁이와 비슷하지만, 키가 작은 데 비해 꽃잎은 좀 더 크고 도톰한 모습이다. 역시 꽃 모양이 벌개미취나 쑥부쟁이와 비슷하지만, 꽃 색이 샛노란 풀꽃도 길섶을 수놓고 있다. 국화과 식물이지만 갯머위, 털머위, 또는 말곰취라고도 불리는 풀꽃이다. 위쪽으로 뽑아 올린 꽃대가 몇몇 가지를 벌어 노란 꽃을 피우고 있지만, 땅바닥에 깔린 잎의 모습은 제법 크고 머위의 잎새를 닮았다. 꽃의 모습이나 색깔, 잎새의 모습 모두가 곰취와도 비슷하다. 그래서 말곰취라는 이름으로도 부르는가 보다.

해국과 갯머위(자료: 네이버)

7

  옮겨 심어진 듯한 큰 둥치의 나무 옆에 큰 표찰이 박혀있다. 팽나무. 그런데, 이 나무를 설명하는 내용이 재미있다. 아주 작은 꽃이 꽃잎다운 꽃잎이 없이 피고 져서 이 나무가 꽃이 핀 것을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크게 자란 이 나무를 통째로 파서 통나무배를 만드는데 이를 ‘마상이’ 또는 ‘마상’이라고 부른다는 설명이 들어있다. 그 몸통을 파서 배를 만들 수 있을 정도면 이 나무가 무척 크게 자란다는 말이 된다. 표피, 나뭇잎, 꽃, 그 자태 등 모두가 느티나무와 비슷한 모습의 팽나무. 느티나무가 육지 마을의 당산목이라면, 팽나무는 이곳 섬의 마을에 심는 당산목일 듯도 싶다.


  굴거리나무는 새빨간 잎자루를 가진 늘푸른나무다. 마로니에, 칠엽수와 같은 나뭇잎을 달고 있다. 후박나무의 나뭇잎처럼 윤기가 돌며 도톰하다. 아직 잎을 달고 있지만, 활엽수로 보이는 참빗살나무가 늦가을 단풍을 물들이고 있다. 이 나무는 노박덩굴과의 나무로 네 장의 꽃잎에 네 개의 선이 있는 씨앗 주머니가 갈라지며 주황색 열매가 익는다는 설명이 붙어있다. 나무마다 미묘한 차이의 색조로 단풍이 든다. 한 나무마저도 그 부위에 따라 단풍의 색채가 다르다. 참빗살나무 잎새들은 빛바랜 연두, 연노랑, 옅은 주황, 빨강이 뒤섞인 다채로운 색조를 보여준다. 옅은 주황색으로 익고 있는 열매가 노박덩굴의 것과 아주 비슷하다.


  바다 쪽 정원의 화산호반에는 전설이 담겨있다고 한다. 용이 살고 있던 이 호수에 불과 물의 정령이 나타나 서로 다투며 혼돈을 초래했으나 용이 이를 제압하여 호수의 평화를 되찾았다는 것이다. 지세로 보아 그곳에 천연의 호수가 있었음 직은 하다. 하지만 지금의 호수는 인공미가 너무 강해서 애초 이곳에 자연호수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떠올리기는 어렵다.


8

  오늘은 테마가 있는 여행, 제주의 독특한 풍광 하나를 오롯이 감상하기로 했다. 여기저기를 쫓기듯 쏘다니지 않고 나름의 여유와 운치가 있는 여행을 하자는 취지에서였다. 며칠 전 어느 일간지의 ‘제주도 감귤 억새 여행’이라는 특집 기사에서 소개된 오름 하나를 오르기로 한 것이다. 따라비오름. 그런데 오늘 하루 우리의 이동을 책임져 줄 운전기사는 잘 모르는 곳이란다. 그가 누군가에게 이리저리 전화를 건 뒤에야 그 위치를 알아냈다. 관광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은, 섬 동쪽에 있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란다. 아침 식사 후 느지막이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여유 있게 드라이브를 즐기며 그곳을 찾고 그 오름을 오른 뒤 내려오는 것이 오늘 하루의 일정.


  1993년 여름 열흘의 일정으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발리까지를 왕복하는 가족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자동차를 손수 운전을 해서 오가는 데만 6일, 발리에서의 여행은 4일. 발리에서의 나흘 동안 실로 여러 곳을 쏘다녔다. 급류타기도 하고 요트 여행도 즐겼다. 발리섬에서 자바섬으로 되돌아오는 카페리를 타기 전날은 하루의 시간을 내서 발리섬 북서부 부두 가까운 곳의 멘장안(Menjangan)이라는 작은 섬을 여행했다. 인도네시아로 사슴을 뜻하는 이름의 섬이었다. 섬에 사는 주민들을 본 섬으로 이주시키고 그곳을 해양생태공원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는 곳이다. 섬의 풍광과 바닷속 해양의 생태가 아름다운 곳이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그 섬에서 몇 시간의 시간을 보내고 그날 오후에 돌아오는 배를 타기 위해서는 그 섬 가까운 곳의 작은 바닷가마을에서 그 전날 저녁을 머무는 게 편리했다. 멘장안섬 여행 전날 늦은 오후 우리는 그 마을의 어느 작은 숙소에 여장을 풀고 바닷가로 갔다. 한적한 바닷가 모래밭에는 한 커플의 외국인 여행객이 누군가로부터 무엇인가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 마을의 한 주민으로부터 멘장안섬은 물론 인근 지역 연안 바다의 생태와 생물에 대한 강의를 듣는 중이었다. 그 커플은 한 달쯤 그곳에 머물며 그 지역 해양 자연, 생태 따위를 공부하고 다이빙 기술 등을 익혀 인근 바다 곳곳을 탐사하는 것으로 그해 여름의 휴가를 보내는 중이라고 했다. 그것은 깃발을 들고 세계 곳곳을 휘저으며 하루에도 서너 곳씩을 달리듯 여행하는 그룹 여행이나 패키지 투어와는 너무도 달랐다.

발리 멘장안섬 바다 모습(자료: 네이버)

9        

  장안섬 바닷가에서 만났던 외국인과 같은 방식의 휴가나 여가를 즐길 만한 여건을 아직은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이번의 여행은 아주 짧은 일정이나마 그런 여유로운 여행의 맛을 찾고 싶었다. 제주의 가장 독특한 풍광의 하나인 오름, 때가 묻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접하고 싶었다. 우리는 운전기사 분이 알고 있던 아주 잘 알려진 ‘다랑쉬오름’이라는 곳이 아닌, 그날 그가 처음으로 들어보았다는 ‘따라비오름’이 있는 곳을 찾아 길을 출발했다.


  서귀포 쪽으로부터 따라비오름에 이르는 길은 두 경로가 있다. 하나는 서귀포로부터 한라산 기슭을 거슬러 올라 섬의 동쪽으로 빗겨 내려가는 길, 다른 하나는 서귀포에서 동쪽 해안도로를 따라 성읍, 성산 쪽으로 가는 길이다. 성읍 쪽 길이 더 가깝고 쉬운 길이지만 우리는 한라산 산길을 택했다. 한라산 쪽으로 향하는 길가로 6월에 월드컵축구 경기가 열렸던 서귀포경기장이 눈에 들어온다. 경기장 지붕 가장자리 쪽으로는 배의 돛대를 세워놓은 듯한 모습의 높다란 기둥들이 솟아있다. 제주를 대표하는 오름의 숫자인 368개에 맞추어 그 숫자만큼의 솟대를 세운 것이라 한다. 경기장의 지붕을 씌웠던 캐노피 천막은 지난여름의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찢기고 벗겨져 철골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건축설계사가 제주에 바람이 많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바람이 그토록 거세다는 건 알지 못했던가 보다.


  516도로를 거슬러 올라 한라산 등반을 시작하는 지점인 성판악휴게소에 잠시 멈췄다. 성판악은 생도 2학년 여름방학 때 한라산 등정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선 산과 바다가 모두 보인다. 우리는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내내 내리막길을 달렸다. 섬의 중심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러 산이 보이기도 바다가 보이기도, 온갖 나무들이 키를 키운 나무의 통로 숲길을 뚫고 차가 달린다. 노변의 삼나무가 우리를 도열한다. 몇 해 전 가족 여행 때 올랐던 산굼부리가 오른쪽으로 보이고 비자림 숲을 가리키는 간판이 나타난다.

제주 동부를 서에서 동으로 달리는 1112번 삼나무숲 도로(자료: 네이버)

  따라비오름을 찾기 전에 간단하게 이른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성읍민속촌 근처의 ‘물허벅’이라는 제주 전통 음식점에서 ‘흑돼지볶음밥‘을 먹었다. 바람을 막아줄 모자가 필요하다는 말에 제주의 독특한 방식으로 물을 들였다는 갈옷 모자 하나씩을 사서 썼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따라비오름을 찾아 다시 길을 나섰다. (200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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