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했던 것들이 조용히 멀어질 때
우리 집은 간섭이 거의 없었다. 마땅히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만 지켜지면, 그 흔한 통금도 없었다. 딱 하나, 아주 작은 규칙만 있었다. 어딘가로 갈 때는 반드시 전화할 것.
나와 동생은 학교가 끝났을 때, 친구들과 놀러 갈 때, 놀다가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장소가 바뀔 때마다 부모님께 전화를 했다. 길게 통화하는 것도 아니었다. “학교 끝났고, 친구들이랑 어디 가서 놀 거예요.” 그 정도가 다였다.
부모님은 늘 “알겠어”라는 짧은 대답만 남기고 전화를 끊으셨다. 시간이 늦어지거나 조금 멀리 가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화 한 통이면 허락은 쉽게 내려왔다. 간섭하지 않는 대신, 최소한 어디 있는지만 알고 계셨다. 그때는 그게 얼마나 큰 신뢰였는지 잘 몰랐다.
성인이 되고 군대에 가서도 그 규칙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훈련 때문에 전화하지 못하는 날을 제외하면 거의 매일 부모님과 통화를 했다.
하루에 서너 통은 기본이었다. 특별한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밥은 먹었는지, 오늘은 어땠는지, 별일은 없는지. 말보다 목소리를 확인하는 시간이 더 길었다.
전역 후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면서 독립을 했다. 집을 나와 내 공간을 갖게 되었을 때 이상하게도 더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죄책감 같은 게 생겨서 의식적으로라도 자주 연락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일이 바빠지고 아내와 함께 살며 ‘내 가정’이 생기자 전화는 점점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늦었고, 내일 하지 뭐라는 생각을 하다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렇게 며칠이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퇴근길에 우연히 휴대폰 통화 기록을 보았다. 최근 일주일 동안 부모님과 통화를 한 기록이 없었다. 나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뭔가 효도를 잘하는 아들이라는 말이 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저, 부모님과의 거리가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매일 듣던 목소리가 이제는 며칠 들리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게 느껴진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언제나와 다르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주일 동안 전화 안 한 거 모르셨어요?”
어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네가 바쁜 거 뻔히 아는데 뭘. 얼른 집에 가서 밥 챙겨 먹어야지.”
평소와 같은 대화였고 짧은 통화였다. 전화 한 통을 기준으로 삼았던 그 작은 규칙이 어느 순간부터는 굳이 지키지 않아도 되는 일이 되어버렸다. 부모님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는데 나만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 전화를 끊고 한참 동안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부모님과의 거리는 갑자기 멀어진 것이 아니라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생겨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건 잘못이라기보다는 삶이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틈에 가까웠다. 이제는 매일 전화를 하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되었고, 부모님 역시 그 사실을 이미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쩌면 나보다 먼저. 부모님이 느끼고 계셨을지 모른다.
그래서 더 이상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예전으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분명해진 게 하나 있다. 당연해서 의식하지 않게 된 일일수록 이제는 조금은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하던 전화 한 통이 이제는 마음을 써야 이어지는 일이 되었다는 것뿐이다.
오늘은 특별한 이야기가 없어도 전화를 걸어보려고 한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고, 예전처럼 짧게 안부만 묻는 전화.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