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방식
힘듦을 드러내지 않는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언제나 느긋했다. 쉽게 열을 내지 않았고, 일의 크기를 키우지 않았다. 웬만한 일에는 “그럴 수도 있지”, “별거 아니야”라는 말을 먼저 꺼냈다.
문제가 생겨도 표정이 크게 바뀌지 않았고, 상황을 설명할 때도 감정을 앞세우지 않았다. 그런 태도는 늘 안정적으로 보였다. 그래서 한동안은, 그 여유를 걱정하지 않았다.
이 친구는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는 편이다. 기쁜 일도 굳이 자랑하지 않고, 힘든 일은 더더욱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묻지 않으면 설명하지 않고, 묻더라도 짧게 대답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 친구가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늘 비슷한 톤으로 웃고 있었고, 항상 괜찮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연락이 예전보다 느려졌고, 약속을 잡기가 어려워졌다.
“이번엔 좀 바빠서”
“다음에 보자”라는 말이 반복됐다.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굳이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어른이 되면 그럴 수도 있지, 각자 사정이 있겠지 하고 넘겼다.
사실 아쉬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감정을 앞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나중에야 다른 친구를 통해 알게 됐다. 친구는 학교를 휴학했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 혼자 감당해야 할 일들이 꽤 많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든 감정은 걱정이 아니라 서운함이었다. 왜 말 안 했을까, 왜 우리에게는 조금도 기대지 않았을까. 우리가 그 정도로 믿음직스럽지 못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서운함은 금방 지워졌다.
우리는 이 친구에게 특별히 눈에 띄는 배려를 하지 않았고, 그가 바빠질 때 더 다가가지도 않았다. 친구가 부담스러워할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냥 괜찮은가 보다 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이 지점에서 나는 다른 친구를 떠올렸다. 언제나 바르게 살던, 그래서 내가 먼저 걱정을 들이밀었던 그 친구.
그때의 나는 오지랖을 숨기지 못했다. 괜찮은지 묻고, 아쉬움을 상상하고, 조금 덜 버텨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어 했다. 걱정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게 친구의 몫을 덜어주는 일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 친구를 대할 때는 달랐다. 먼저 걱정하는 마음을 꺼내는 것 자체가 실례처럼 느껴졌다. 괜찮아 보이는 사람에게 괜찮냐고 묻는 순간, 그를 설명해야 하는 자리로 밀어 넣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예전과 똑같이 대했다. 그게 그 친구를 존중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친구가 힘들지 않다고 믿은 게 아니라, 힘들다고 말하지 않는 선택을 존중하고 싶었다. 도와주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도움을 강요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표현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걱정을 숨기고, 배려를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그렇다고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언젠가 먼저 말을 꺼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생각하며, 우리는 늘 조금의 여백을 남겨두고 있다. 지금은 말하지 않아도, 도와달라고 했을 때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로 남아 있기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 친구는 여전히 여유롭다. 가끔 만나면 예전처럼 웃고, 별일 없다는 듯 말한다. 그 모습이 여전히 좋으면서도, 여전히 씁쓸하다. 그 여유가 정말 괜찮아서인지, 아니면 너무 익숙해져서인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이제는 그 판단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않기로 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먼저 다가가는 걱정이 필요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한 발 물러나는 걱정이 더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친구에게는 후자였다. 그래서 나는 말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나는 그저 옆에 있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언제든 다시 닿을 수 있는 위치에 서서. 도와주겠다는 말 대신, 도와줄 수 있는 상태로 남아 있는 것. 그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믿는다.
힘듦을 말하지 않는 친구에게 꼭 필요한 건 조언도, 위로도 아닐지 모른다. 그저 말해도 괜찮은 사람 하나, 말하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 사람 하나. 나는 딱 그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 나는 그 거리 밖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