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락하지 않아도 이어지는 사람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전화가 있다. 그리고 아무 목적 없이 걸리는 전화도 있다. 나는 후자가 더 편한 사람이다.
인맥을 관리하기 위해 연락하지 않고,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도 전화하지 않는다.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생각나서, 문득 근황이 궁금해져서 전화를 거는 편이다. 이상하게도 그런 전화는 대개 1년에 한 번쯤 걸린다.
특별한 날이어서 연락을 할 때도 있다. 생일이거나 , 명절 또는 해가 바뀌는 순간정도가 있다. 반면 정말 아무 날도 아닐 때도 있다. 연락처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이름을 보게 되거나 예전에 있었던 웃긴 장면이 떠오르거나 아니면 정말 심심해서 “잘 지내나?”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나올 때가 있다.
오랜만에 걸린 전화는 대부분 비슷한 반응으로 시작된다.
“웬일이야?” 또는 "오랜만이다" 같은 말들이 대부분이다.
가끔은 웃으면서, 가끔은 살짝 경계하는 톤으로 전화를 받는다. 몇 번은 다단계 아니냐, 보험 영업 아니냐는 농담도 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도 웃으며 “아니야, 그냥 생각나서”라고 말한다. 설명하면 할수록 더 수상해지는 말이다. 특히 이성에게는 더욱 조심히 해야 하는 말이다. 그런 걸 알면서도, 그 말 말고는 특별히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통화는 길지 않다.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어디서 사는지, 일은 어떤지. 서로의 삶을 깊게 파고들지는 않는다. 괜히 더 묻지 않고, 괜히 더 말하지 않는다. 그 정도가 딱 좋다.
그렇게 1년에 한 번쯤, 아무 일 없이 통화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주 보지는 않지만, 완전히 사라지고 싶지는 않은 사람들이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고, 그렇다고 잊히기에는 조금 아쉬운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목적 있는 전화를 어려워한다. 부탁을 하거나, 의도를 갖거나 때로는 특별한 소식을 전해야 하는 전화는 늘 한 번 더 미뤄진다. 그건 아마도 내가 나름대로 선을 긋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괜히 관계의 성격이 바뀌는 게 싫었다. 편하게 남아 있던 관계가, 무언가를 주고받아야 하는 불편한 관계로 변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내 결혼 소식도 그랬다.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전했지만, 1년에 한 번 통화하던 사람들에게는 끝내 말하지 못했다. 굳이 말해야 하나 싶었고, 말하는 순간 그 전화가 목적 있는 전화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결혼식이 끝난 뒤에야 소식을 전했다. 이미 다 끝난 일을 뒤늦게 말하는 게 더 이상했지만 그래도 아예 말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했다. 의외로 상대방은 대체로 서운해했다.
“왜 말 안 했어?”
그 말에는 축의금이나 초대에 대한 아쉬움보다, 관계에서 빠져 있었다는 느낌이 더 크게 담겨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먼저 선을 긋고 일부러 거리를 두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반응들을 보면 내가 혼자만의 기준으로 관계의 선을 정해두고 있었구나 싶었다. 그중 몇몇은 늦었지만 축의금이나 선물을 보내주기도 했다.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도, 식에 초대받지 않았는데도. 그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묘하게 미안했다. 생각해 보면 그 사람들은 내 삶에 깊게 들어와 있지는 않지만, 완전히 바깥에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서로의 현재를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잘 지내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만큼은 분명히 남아 있는 관계였다.
나는 여전히 목적 없는 전화를 더 좋아한다. 아무 일 없이 안부만 묻는 통화가 편하다. 이게 내가 마음이 편한 연락이다. 하지만 목적이 있다고 해서 꼭 부담이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은 알게 됐다. 소식을 전하는 게 관계를 어색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어쩌면 그 관계를 여전히 살아 있게 만드는 일일 수도 있다.
1년에 한 번 연락하는 사람들은 자주 보지는 않지만, 가끔은 내 소식을 알려주고 싶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들의 소식이 궁금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주 느슨한 선으로 이어져 있다. 쉽게 끊어지지는 않지만, 억지로 당기지도 않는 선이다. 나는 그 선이 아직도 좋다. 그래서 아마 내년에도, 아무 목적 없는 전화 한 통을 또 걸게 될 것이다.
“그냥 생각나서.”
그 말이 여전히 어색하지만, 그만큼 솔직한 말도 없다. "그냥"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관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