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매는 게 일상이다
우리 마님이 종종 하시는 말씀이 있다. "사람들의 삶을 잘 들여다보면 모두가 층층만층 구만층이다."
층층만층 구만층. 나는 가끔 노래를 부르듯 그 말을 외곤 한다. 사실, 이 말은 꽤 쓸모가 많다. 나보다 잘 사는 것 같은 사람을 보며 불합리한 질투에 시달릴 때나,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과 맞서야 할 때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 꽤 많은 도움이 된다. 상대방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혹은 그런 시늉이라도-된다.
하지만 그 말이 나 자신에게만큼은 쉽게 적용되지 않는다. 당장 내가 힘들어 죽을 것 같은 순간에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 말이라는 얘기다. 당장 힘들어 죽겠는데 뭐 어쩌라고! 왜 내 길만 이렇게 구불구불하고 돌투성이야!
……그런 생각을 하지.
하긴 어떤 명언이든 그렇지 않을까 싶다. 힘들고 어려울 때, 구덩이에 빠진 것 같을 때, 진창에 처박힌 채 두 번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을 때. 그런 순간에 누군가의 격려(가끔은 질책) 섞인 한 마디를 떠올리며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은 실은 뭘 해도 성공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인생은 그다지 험난하지도, 또 그다지 순탄하지도 않았다. 나는 항상 그게 문제였다. 애매한 사람이라는 것.
애매하게 잘 하고, 애매하게 못 하고, 마무리를 지었는지 아닌지 모르게 애매한. 여기가 맞는지 아닌지 애매한. 돌아가야 하는지 아니면 계속 가야 하는지, 멈춰 서야 하는지 무작정 돌파해야 하는지 애매한.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닐 시절, 정답이 있는 공부를 썩 좋아했던 것도 아닌 주제에 정답이 없는 삶을 살아나가는 게 힘들고 버거웠다. 여러 모로 병이 깊은 사람이었다. 최근까지만 해도 그랬다. (근래에는 아마도 화타의 환생인 것 같은 선생님을 만나 아주 좋아졌고, 좋아지고 있다) 참을성이 없고, 폐문을 맞닥뜨리면 쉽게 좌절했다.
생각해 보면 늘 옆길은 있었다. 또 어떤 옆길은 내가 처음 선택했던 길보다 나은 길일 수도 있었다. 혹은 옆길로 빠지지 않고 정면으로 계속 나아가는 선택지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떤 것도 선택할 수가 없었다. 무엇을 선택하든 내 인생은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며, 어둡고 축축한 지하 저 멀리까지 내리막길 일로일 것 같았다.
어렸을 때, 나는 누구보다 하고 싶은 것이 분명한 어린이였다. 좀 성장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하고 싶은 일, 되고 싶은 것. 그것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하거나 다른 길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공상에 빠지고 그것을 시로, 소설로 옮기는 게 나의 일이었다. 나의 전부였고 나의 모든 시간 그 자체였다. 누구나 감정이 복잡할 수밖에 없는 중고등학교 시기를 거치면서도, 헤매기는 하였으나 그 꿈 자체가 흔들린 적은 없었다. 체리필터 노래 한 구절 같은 삶이었다.
난 내가 말야, 스무 살 쯤엔 요절할 천재일 줄만 알고.
하지만 당연하게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애써 외면해 오던 것을 절실하게 깨닫자 사람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나에게 있어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나는 뛰어난 천재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자 당황했다. (정말 민망하지만 이걸 이십대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앞에도 말했듯, 옆길은 늘 있었다.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 또는 내가 보려 하지 않았을 뿐.
혹은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도 있었다. 내가 천재가 아니면 어때서? 가다 보면 언젠가는 뭐라도 나오겠지.
전자는 융통성이, 후자는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다. 내게는 둘 다 없었다. 치료 시기를 놓쳐 아예 고질병이 돼버린 병 때문에 사고가 완전히 굳어버렸다. 무기력해졌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어찌저찌 취직을 하고, 힘들어 울면서 출퇴근을 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뭔가가 펑 터져버렸다. 굳이 자세히 쓸 필요성은 느끼지 못 한다. 하지만 뭔가 터졌다. 그날을 돌이켜 보면 그런 감정만이 내 안에 남아 있는 걸 알 수 있다. 이상한 색깔의 조약돌처럼, 눈에 띄면서도 매우 단단한 어떤 형태로.
결국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업 작가가 되었다. 상업 작가가 되고 보니 다른 것도 쓰고 싶어졌다. 친구들이 몇 년 전부터 설득하던 SF <별의 도시>를 내놓았다. 다른 일을 하면서도 매일 글을 쓴다. SF도 여전히 쓰고 있다.
잘난 척 몇 줄 썼지만, 사실 나는 아직도 헤매고 있다. 힘들어지면 또 '돌아가야 하나?' 혹은 '그만 멈춰 서야 하나?' 쓸데없는(내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고민을 한다. '폐문'이라는 말에 좌절해서 그 아래 떡하니 박힌 출입구와 화살표를 보지 못 하기도 한다.
그래도, 헤매는 게 일상이라도, 구불구불하게 가더라도 혹은 남들보다 느리더라도, 어쨌든 살아있는 한 걷는 걸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서서히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다. 엎어져 있는다고 해서 시간이 멈추는 것은 아니라는 걸. 지금 멈춰 서면 일 년, 이 년, 십 년이 지난 후에 또 지금처럼 혹은 지금보다 더 후회하고 괴로워져 감당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자꾸만 상기한다.
삭은 나뭇잎과 흙이 뒤섞인 푹신하고 향긋하고 걸음을 내딛기 힘든 길을 터벅터벅 걷는다. 점점이 흩어진 나뭇잎의 그림자가 아름다워 울었다가 해의 방향을 가늠할 수 없어서 좌절한다. 이 빽빽하고 어두운 숲에서 나를 샘으로 이끌어 줄 푸른 새가 나타나면 좋겠다고 가끔 생각했다가, 결국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되뇌면서 또 걸어간다. 내가 가는 길이 완벽한 정답은 아니더라도, 여기까지 걸어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만큼 조그만 샘까지는 닿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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