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어떤 사람에게든 좋아하는 장소가 있을 것이다. 아니다. 여기서는 좋아하는 장소라기보다는 집착하는 장소라고 말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어떤 사람에게는 집착하게 되는 장소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내 경우에는 바다가 그런 곳이다.
왜 바다를 이렇게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해서 여름철의 해수욕장에 놀러가 본 적이 별로 없다. 이따금 간 적이 있다 하더라도 그다지 좋았던 기억도 없다. 지저분해진 바닷물과 여기저기 뒤엉켜 있는 사람들, 술에 취한 사람들, 고성방가……. 그런 것들을 대면하고 있노라면 위로가 되기는커녕 사는 게 오히려 지긋지긋해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바다는 좋아한다. 수영이 금지된 곳들, 해수욕장이 아닌 곳들. 그냥 바라만 봐야 하는 곳들. 나는 겨울 바다에 가는 것을 좋아하고, 또 밤에 바다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해가 지고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 바닷가에 가면, 때로 바다가 통째로 부풀어 오른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아주 둥글고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깊은 곳에서부터 천천히 숨을 쉬며 올라오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수영도 못 하는 주제에 보노보노처럼 물에 둥둥 떠 이리저리 흘러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파도가 아주 높은 날에도 그만 천천히 걸어 들어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파도에 쓸려 휙 녹아버릴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아주 편안하게 가라앉을 것 같기도 하고, 그것도 아니면 물 위에 누워 어딘가로 떠내려갈 수 있을 것 같다. 편안하게, 걱정도 불안도 없이. 그런 상상 속에서 나는 망망대해에 표류한 불쌍한 조난자가 아니다. 나는 그냥 바다 위를 떠다니는 이상한 생물이다. 헤엄치려 노력하지 않는 이상한 생물체.
내가 사는 곳은 바다가 가깝다. 도시 구역을 벗어나지 않고도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어떤 곳은 물이 아주 푸르고 깊고, 또 어떤 곳은 해변에 돌이 가득하다. 어떤 곳은 얕고 파도가 잔잔해서 여름철이면 사람이 들끓는 해수욕장이다. 나는 별 일이 없어도 종종 바다를 보러 가자고 말한다. 바람과 함께 파도가 휘몰아치고, 그 파도에 돌들이 쓸려갔다가 다시 굴러오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영원히 여기에 앉아 파도 소리를 듣고 있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바다가 사람에게 위로를 주는 이유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게 있어 바다는 우주를 상상할 때와 비슷한 광활함을 느끼게 하는 장소다. 생각한들 이해할 수 없는,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이것 하나에만 매달린다 해도 결코 모든 것을 밝혀낼 수 없는, 어떤 상상이건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그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
그런 막막한 광활함, 인간은 알 수 없는 거대한 뭔가가 항상 좋았다. 지금보다 좀 더 어렸을 때는 우주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 지금도 관심은 있지만, 그때처럼 여러 가지 책을 찾아 읽거나 하지는 않는다. 내 안의 흥미 바구니에서 '우주' 항목의 크기가 좀 작아지고 모양이 단순해진 대신, '바다' 항목은 몸피를 부풀려 명확히 자리를 잡았고 그 모양이 나날이 다채로워진다. 바다 한가운데에 솟은 바위가 그렇듯, 그러나 고개를 돌릴 때마다 모습이 달리 보이는.
답답할 때, 울적한 일이 있을 때,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 그럴 때는 무작정 바다를 보러 가고 싶어지고 거의 항상 보러 간다. 상태가 아주 좋지 않을 때는 바다가 움직이는 소리도 부풀어 오른 듯한 모양도 큰 변화를 주진 못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보니, 어쩌면 바다를 좋아하게 된 것은 자살사고가 뚜렷하고 강렬해진 청소년기 즈음부터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만 걸어 나가면 이 싫고 지겹고 고통스러운 것들을 다 떨쳐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안심하게 된 것인지도.
시도를 해 본 적은 없다. 다행스럽게도.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토록 불안정한 시기는 얼추 지나갔고, 지금은 '바다에서 죽으면 유족들이 벌금 내지 않나? 환경 오염 관련 경범죄로?'하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에)
가만히 바다를 보고 있으면 파도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양 손을 호랑이처럼 치켜들고 '왁!' 장난을 치는 어린애 같았다가, 혹은 은근히 다가오는 손길 같았다가, 때로는 모든 것을, 혹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기 위해 바위와 땅 위에 머리를 찧는 것처럼도 보인다. 해변에 가득한 조약돌들과 입을 맞추고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런 움직임들이 내게는 위로가 된다. 나 아닌 다른 무언가가 이렇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 나는 그것을 지켜만 보고 있어도 된다는 것. 그런 것들이 아주 잠깐이나마 평온함을 준다.
멀리서 아른거리는 커다란 배들, 혹은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다리, 물굽이를 만드는 크고작은 바위들, 무언가로 쿡 찔러 긁어낸 것처럼 깊숙이 파고든 동굴 같은 흔적들이 전부 다 모여서 나의 바다를 만든다. 나는 머릿속에 적당한 농도의 소금물을 잔뜩 집어넣고서, 기분 좋게 서늘한 물 속으로 천천히 걸어가 눕는다. 그러면 바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나를 멀리까지 데려간다. 아무도 없고 조용하고 어두운 곳으로.
그러고 보니 아직 필름으로는 밤바다를 찍어본 적이 없다. 플래시를 능숙하게 사용할 자신이 없어서인데, 다음에는 도전을 해 봐야겠다. 디지털과는 또 다를, 괴상하게 번뜩거리는 바다를 찍어 와야지.
minolta X-700, nikon fm2
cinestill BWXX, kodak ultramax, fuji 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