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로 내 인생에서는 연애를 빼 놓을 수 없다
이전 직장에서 근무할 때, 동료 선생님이 나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김쌤은 남자친구에게도 애교 같은 건 절대 안 부리실 것 같아요."
그건 정말 우스운 말이었다. 그때는 그냥 웃어 넘기고 말았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내 속에 따로 있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니요, 전혀요. 전 엄청난 어리광쟁이고 애교가 일상이에요. 종종 밖에 나갔을 때 사람들 앞에서 자중하느라 애써야 해요." - 그런 말을 했던들 그 선생님은 아마 믿어주지 않으셨겠지만.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은 하나 더 있었다. "근데 남자친구가 아니라 여자친구예요."
나는 성소수자다. 정확히 내가 무엇인지 열거하는 것은 귀찮으니까 대충 그렇게 넘어간다. 어쨌든, 나를 아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의외로 내 인생에서는 연애를 빼 놓을 수 없다. 우리는 열여덟 살에 만나 친구가 되었고, 열아홉 살 겨울에 사귀기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계속 연애를 해 오고 있다. 반올림 하면 이십 년차에 접어드는 관계다.
파트너는 나의 많은 것을 이해해주는 편이다. 고장난 회로와 종종 너무나 심각하게 불안해지는 정서와 기타 여러 취미들. 둘이 공유할 수 있는 취미도 많지만, 우습게도 내 필카 취미는 그렇지 않다. 파트너의 말에 따르면,
"필름 카메라의 온갖 단점과 불편리성을 고치고 또 고쳐서 만들어진 게 디지털 카메라 아니겠니?!"
그러나 내 필카(및 여러 아날로그 애호) 취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있는 힘껏 이해해주는 것이 또 내 파트너다.
"그래, 난 잘 모르겠지만 네가 좋다니 되었다."
내 파트너는 이렇게 좋은 사람이지만, 실상 우리의 처음은 흔들린 사진 같은 연애였다. 20대 초중반,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고 울었고 혼란스러웠다. (정체성은 전혀 혼란스럽지 않았다만) 나는 여러 번 이 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지, 지속해도 될지에 대해 생각했었다. 아마 나의 파트너도 그랬을 것이다. (안 그랬다면 미안하다)
하지만 그 혼란한 와중에도 우리에게는 분명 아름다운 시간들이 있었다. 지금 이 시기에 그때를 되돌아 본다면, 과장을 섞어 모든 게 다 빛나고 반짝거렸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건 감성적인 거짓말이고, 흔들리고 불안한 와중 아름다운 파편들이 꽤 많았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열여덟 살에,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서로에게 닮은 점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렇게 내 취향을 잘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수가!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닮았다고 생각하는 건 결국 표면적인 것들에 지나지 않고, 거기서 조금만 파고 들어가도 사람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다른 곳이 있기 때문에 서로를 좋아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연인이 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서 몰랐던 단점들을 더 많이 찾아냈다. 굳이 눈을 부릅뜨고 보지 않아도 보였다. 20대 초중반을 한집에서 함께 있었으니까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짧게 연애하고 결혼한 신혼부부가 이혼을 가장 많이 생각한다는 때가 바로 신혼초라더니 우리가 딱 그짝이었다. 이십여 년 동안 전혀 다른 생활 공간에서,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고수하며 살다가 느닷없이 함께 살게 되었으니 싸우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사소한 것에서 시작한 싸움은 가면 갈수록 격렬해지고(젊어서 기운이 넘쳤다),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얘-내 파트너-는 나랑 전혀 닮지 않았어. 나랑 너무 달라.
해일처럼 몰아치는 혈기왕성한 20대를 지나고, 다시 서로 따로 살게 되고, 삶의 궤적이 비틀리고 변화하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과정 속에 우리는 계속 같이 있었다. 이제 우리는 거의 싸우지 않고, 싸우더라도 하루가 지나기 전에 곧장 화해하는 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있으면 여전히 너무나 즐겁고, 시시껄렁한 대화가 너무나 웃기고, 몇십 번이나 갔던 곳을 또 가더라도 산책길은 재미있다. 같은 장소라도 또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생긴다. 지난 번에 했던 이야기를 또 해도 재밌다. 백 번쯤 반복해도 백 번 다 둘 다 빵 터지는 농담거리가 있다. 휴대폰 카메라로 밤하늘도 환하게 찍을 수 있는 시대에 다달이 필름값 지출 비용을 따로 빼 놓아야 하는 나를 타박하지 않는다. 내가 찍은 사진을 보면서 항상 멋지고 아름답다고, 어떻게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느냐고 진심으로 감탄해준다.
우리는 장미가 피면 매번 장미축제에 간다. 가 봐야 지난 번과 똑같은 장미가 있을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나는 우리의 연애도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사실, 반올림으로 이십 년쯤 같이 있다 보면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새로운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익숙한 아름다움과 익숙한 향기, 익숙한 온도가 있다는 걸 확신할 수는 있다. 장미축제에 가면서 무지개색 장미나 춤추고 노래하는 장미를 보게 될 거라 기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공원 가득 핀 장미의 향기와 연약하면서도 단단한 빛깔에 감탄하리라는 건 알듯이. 뭔가 대단히 새로운 것, 대단히 놀라운 사건은 없을지라도 둘이 함께 있으면 어떻게든 즐거운 시간이 될 수 있음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나와 파트너는 이제 서로가 전혀 닮지 않았음을 안다. 우리는 모양도, 재료도, 질감조차도 전혀 다른 두 개의 조각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이 하나 같다. 그건 색깔이다. 우리는 색깔이 같은 관계다. 사상이라는 단어로 아우를 수 있는 대부분의 것들이 비슷하다. 사회에 대한 생각, 정의에 대한 생각, 본질에 대한 생각 같은 것들이. 아마 그렇기 때문에 서로 그토록 다른 인간이면서도 함께 있는 게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조건은 '같은 색깔'이었을 것이므로.
nikon fm2, minolta X-700
kodak colorplus, nevo 400, fuji 200, rollei retro 200
덧. 브런치 키워드 웃기네. 퀴어/LGBTQ 관련 선택 가능한 키워드가 하나도 없는 이유가 뭔지요? 제목과 내용에 '연애'가 들어갔다고 자동으로 '남자친구' 키워드 선택해 주는 것도 왕 웃김. (안 웃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