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아슬한 도망의 기록
7월 말부터 지금껏 나는 거의 일에 파묻힌 채 살았다. 절반은 스스로 불러온 재앙, 그리고 절반은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7월 중순, 또 하나의 일을 마무리 지은 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지냈다. 다음 글을 쓰면서도 잡생각에 자주 빠져들었고, 이번에는 또 얼마나 많은 거절과 탈락의 산을 지나가야 겨우 이걸 내 글이랍시고 내놓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 때문에 순간순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벌써 몇 번째나 했던 생각을 또 했다. '이거 그냥 그만 둬 버릴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러던 와중, 믿을 수 없이 좋은 제안이 왔다. 망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일정이 촉박했지만 상관없었다. 내 재주는 글을 빨리 쓴다는 것이니까. 폭발적인 인기를 끌 만한 글은 못 쓰지만, 메이저 감성에 뛰어들어 자유자재로 파도를 타며 억대의 수익을 올리지도 못 하지만, 그래도 빨리는 쓸 수 있었다. 기승전결 전체의 균형도 어느 정도 맞출 수 있다! 나는 제안을 수락했고, 계약이 진행되었다. 그러던 와중 마무리 지었다 생각한 일이 새로운 방향으로 물꼬가 터졌다. 이 일정 역시 촉박했지만 애정을 가졌던 일인지라 반드시 하고 싶었고 해야만 했다. 졸지에 촉박한 일이 두 가지가 되었다. 여기까진 그래도 좋았다.
8월 중순쯤, 새로운 제안이 들어왔다. 믿을 수 없이 좋은 제안 두 번째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망설였다. 그건 앞의 두 가지만큼 촉박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일이 겹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망설이다 거절할 만큼은 못 되었다. 기회였다. 그것도 잡아야 하는 기회.
그리하여 나는 한꺼번에 세 가지 일을 하게 되었다. 물론, 학원에 나가는 것과는 별개로.
숨 돌릴 틈이 없었다. 번아웃 때문에 나가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 정한 하루 최대의 마지노선이 만 오천 자만 쓰는 것이었다. 수업을 하러 가기 전에 오천 자를 쓰고, 수업을 하고 돌아와서 나머지 만 자를 썼다. 틈틈이 책을 읽어야 했고, 영화도 봐야 했다. 학원 일도 소홀할 수 없기에 상담도 진행하고 수업 준비도 하고 숙제 검사도 해야 했다. 주말에 불이 붙으면 삼만 자도 쓰고 삼만 오천 자도 썼다. 그 이외 필요한 자료를 찾고, 요구하는 자료를 찾아 보내기도 했다. 미친듯이 글을 쓰며 8월을 보내고, 9월을 보내고, 일기에 쓸 말이라고는 '일하고 밥을 먹었다 이제 잔다'밖에 없는 생활을 한 달 반 가까이 했다.
그러면서도 아직 번아웃은 오지 않은, 그러나 아슬아슬한 단계였다. 나도 내가 언제 끊어질지 몰라 가끔 불안할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일은 계속해서 해야만 했다. 계약을 했으면 성실히 이행하는 것이 사회인이니까. 그리고, 글만 내 마음에 들게 나와주면 몸이 힘든 것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내 손가락 연골들의 생각은 좀 다르겠지만, 뭐.
하지만 파트너가 보기에는 내 상태가 영 괜찮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그럭저럭 잘 해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목요일에 파트너가 갑자기 경주 여행을 제안했다. 가서 하루 종일 바람도 쐬고 삐삐(세상에서 최고 귀여운 강아지)와 산책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자면서. 다음 날인 금요일은 학원 일을 하지 않는 날이라 하루 종일 글을 쓸 수 있어 고민을 했지만……. 그래, 나도 좀 쉬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 동안 사진도 한 장 못 찍었고, 냉동실의 필름들이 울고 있었다. 나는 필름을 다섯 롤 챙기고, 카메라는 니콘과 미놀타를 둘 다 챙겼다. 목요일에 수업을 다 마치고 퇴근한 후에 앉은 자리에서 이만 자를 썼다. 평소보다 한 편을 더 쓴 것은, 금요일에 쓰지 못할 분량을 하나 충당한 것이었다.
날씨가 너무나 좋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파란 하늘을 머리에 인 채, 뒷좌석 캔넬에는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강아지를 태우고 파트너와 함께 도로를 달리는 건 기분 좋았다. 시답잖은 수다, 깔깔거리는 웃음, 스포티파이에서 흘러나오는 좋아하는 노래. 모든 게 다 좋았다. '일을 해야 하는데'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번쩍번쩍 나타났지만 잊으려고 애를 썼다.
우리는 가장 먼저 풍력 발전소에 갔다. 경주를 몇 번 왔다갔다 하면서 먼 산에 풍력발전기가 돌고 있는 건 본 적 있지만, 그곳까지 올라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었기에 기대가 되었다. 길은 익숙한 그 길이었다. 불국사에서 석굴암쪽으로 올라가는 길. 하지만 그 뒤로도 거의 2km나 되는 꼬불꼬불 산길이 우리를(정확히는 운전 중인 파트너와 우리의 부릉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의 공통된 생각을 말하자면, 이건 길이 아니었다. 무슨 거대한 짐승의 창자 속을 따라가는 것 같았다. 구불구불한 길을 끝도 없이 올라갔다가 갑자기 내려가기 시작했다.
파트너: 밤중에 오면 공포특급이겠는데?
나: 나 갑자기 그런 게 생각났어. 밤중에 이런 산길을 운전하던 운전자가 굴 안으로 들어가게 됐는데, 사실 그게 굴이 아니라 거대한 짐승의 배 속인 거야. 창자를 따라 계속 배 속 깊은 곳까지 들어가게 되고 만 거지……. 아니면 꼬불꼬불한 산길을 운전해 가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까 봤던 표지판이 또 보이는 거야. 두 번째, 세 번째 계속해서 보이는…….
파트너: 왜 또 호러섬이 질질 새고 있는 거야? 호러섬 발전기 좀 끌 수 없어?
나: 그건 내 맘대로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인사이드 아웃을 보신 분은 이 대화의 맥락을 아실 테다. 라일리에게는 사랑스런 엉뚱섬과 가족섬이 있었지만, 나의 코어에는 호러섬이 있다)
그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정말로 풍력발전기가 코앞에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너무나 거대해서 거의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날개가 돌 때마다 웅,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바닥과 바람까지 떨리는 것 같았다. 하늘은 새파랗고 우리는 너무나 높은 산 위에 있었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믿기지 않게 아름다웠다.
우리는 한참이나 발전기가 도는 것을 구경하고, 하늘의 색깔에 감탄하고, 새로운 곳에 와서 완전 신난 삐삐와 함께 주변을 산책했다. 발전소 아래로 산책로가 꽤 넓게 펼쳐져 있었다. 오늘 목적이 풍력발전소 한 군데가 아녔던지라 가까운 루트로만 돌았지만, 날씨가 좀 더 선선해지면 배를 든든히 채우고 한가롭게 걸어다녀 보고 싶은 곳이었다.
산책을 마치고 난 후에는 점심을 먹으러 갔다. 강아지를 동반하여 별실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인데, 강아지 동반으로 경주에 오면 꼭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삐삐가 어찌나 기운이 넘치는지 파트너와 내가 번갈아 가며 그 좁은 별실에서 공을 던져주고, 한편으로는 밥을 먹고……. 분주했다.
그 다음으로 들른 곳은 경주 엑스포. 여기도 늘 지나다니면서 희한한 건물 뭐야~ 하고 웃어 넘기기만 했던지라 들어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부지가 굉장히 넓어서 강아지 데리고 산책하기는 참 좋았다. 비록 건물 안까지는 반려동물을 데리고 들어갈 수 없어서, 전망대는 나 혼자 다녀왔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는 것도 색다른 맛이 있기는 했지만, 그 이외에는 좀 심심했다.
엑스포를 돌아다닐 때쯤 해서는 '일해야 하는데'하는 생각도 거의 사라진 후였다. 필름을 벌써 두 롤째 갈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웠다. 날씨도 좋고. 목이 무척 말랐다는 것만 제외하면 아주 좋았다…….
삐삐는 넓은 잔디밭을 찾아 신나게 공놀이를 했고, 나는 파트너가 삐삐와 공놀이를 해 주는 동안 멍하니 벤치에 앉아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울적해졌다가, 행복해졌다가, 알 수 없는 기분이 번갈아 몰려왔다. 내가 지금 이렇게 놀고 있어도 될까, 못 놀 건 또 뭐야? 하루 논다고 세상이 망하나? 인생이 끝장나고 계약이 깨지나? 그런 건 아닌데 왜 자꾸 이렇게 불안할까. 내가 지금 이렇게 일하고 있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들이 차곡차곡 몰려오다가 바람이 휙 불자 신기하게도 사라졌다. 집에 틀어박혀 있었더라면 그러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오늘 여행은 옳은 선택이었다. 내 파트너는 그렇게 번아웃의 첫 번째 돌부리 앞에서 나를 슬쩍 끌어내어 준 것이었다.
엑스포에서 한참을 놀고 강아지 동반 가능한 카페에서 잠시 숨 돌릴 타임. 이쯤 되니 강아지도 약간 지쳤고 우리도 기운이 빠져서(노는 건 정말 힘든 일이야!) 어쩔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나온 김에 저녁까지 먹고 돌아가기로 했다. 그 전에 카페에 앉아 한참이나 시간을 보냈다. 야외석에 앉아 있으니 바람이 시원했고, 밝았던 하늘이 차차 어두워지면서 쨍한 분홍빛의 노을로 변해가는 것을 보는 게 기분 좋았다.
저녁을 먹고, 드디어 에너지를 다 소진해 기절한 삐삐 공주님을 다시 캔넬에 태우고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토요일 오전에 나는 학원에 출근해 수업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 일을 했다. 일요일에도 일을 했고, 오늘도 일을 했다. 길게 잡는다면 내년 여름쯤까지는 이 정도로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후회할 수는 없다. 무리한 일정이기는 하지만 놓칠 수 없는 좋은 기회였다는 건 부정할 수 없으므로. 욕심을 냈다고도 할 수 있을 테다. 앞에도 말했듯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다. 하지만 불평할 수 없다. 내가 선택한 일이니까.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넘어질 것 같으면, 나조차 알아차리지 못 한 사이 아슬아슬한 곳까지 가 버리면 내 손을 잡고 의자에서 끌어내어 함께 일상에서 도망쳐 줄 파트너가 있으니까. 네가 나를 보고 있으니까.
첫 언덕을 잘 넘어갔다. 하지만 두 번째 언덕이 곧 또 올 것이다. 그때는 또 어떤 방법으로, 어디로 번아웃을 피해 도망칠까. 아슬아슬한 순간이 언제인지를 잘 감지하고 있다가 요령 좋게 피해 가야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일하지 않는다고 내가 게으른 인간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계속, 조금씩 받아들이고 나를 세뇌해야지.
아래는 삐삐(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강아지)의 사진들.
우리 삐삐 행복했니? 네가 행복했다면 언니들도 좋아.
nikon fm2, minolta X-700
kodak ultramax 400, colorplus 200
ektar100
fuji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