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래간만에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 같다. 눈코 뜰 사이가 없이 바빴다……는 건 핑계의 대표 주자임에도, 이번에는 핑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 해야 할지, 아니면 나를 어엿비 녀겨야 할지 잘 모르겠다.
사실 일이 너무 바쁜 나머지 사진을 찍으러 슬렁슬렁 돌아다닐 만한 시간이 없었다. 그럼에도 갤러리를 보니 틈틈이 어떻게든 숨통을 터 보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필카 취미를 시작하고 나서 제일 좋았던 것 중 하나가 흑백 필름을 써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기타 프로그램으로 보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진짜로 흑백으로밖에 나오지 않는 사진을 접한다는 게……. 퍽 새로운 기분이었다. 흑백 필름을 처음 써 보면서 불안감 반, 기대감 반으로 현상을 했고 결과물을 보자마자 생각했다. 컬러 필름과 흑백 필름 중 평생 한 종류만 써야 한다면 뭘 고를래? 라고 한다면 나는 흑백 필름을 고르겠구나 하고…….
흑백 사진의 느낌이 특별히 좋은 이유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하자면 날밤도 샐 수 있겠지만 간단하게는 그 단조로움이 좋다. 무채색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진다는 사실을 실감하면 세상이 좀 더 멋지게 느껴진다. 색깔이 있는 세상과 없는 세상, 세상에 존재하는 색깔을 한꺼번에 빼앗았다가 어지럽게 돌려놓는 상상을 한다.
이전 번아웃 글에서 짧게 썼지만, 나는 상당히 큰 규모의 공포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인사이드 아웃 보세요 두 번 보세요) 이 섬은……. 도대체 언제부터 생겼는지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내가 기억하고 인지할 수 있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 안에 존재했다.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 아주 좁은 틈새, 아주 작게 고여 있는 어둠, 평소와 똑같은 풍경의 색깔이 약간 달라 보일 때……. 내가 보고 듣고 감각하는 거의 모든 것이 공포섬 발전기로 연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공황장애가 있었던 것도 공포섬 과부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많은 공포 요소들을 무서워 하고 꺼리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내 공포섬은 말하자면 능동적인 공포섬이다. 인풋이 없으면 알아서 자가 발전을 하고, 인풋이 들어오면 신나서 날뛴다. 내 파트너이자 짝꿍은 호러 영화를 '돈 주고 스트레스를 사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ㅋㅋㅋ) 나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흑백 사진은 나의 공포섬에 아주 멋진 자양분이 된다.
컬러 필름으로 찍었더라면 볼 수 없었을 그림자들. 어둠에도 깊이와 층위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면 공포섬이 신나서 희희낙락 돌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셀프 일상 호러물을 늘 즐기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필름 카메라 애용자로서 눈 닿는 모든 곳을 흑백으로 찍어내는 건 꽤 스릴 넘치는 일이다.
흑백으로 현상한 사진들을 볼 때는 그곳의 풍경이나 냄새, 소리가 어땠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컬러 필름이나 DSLR, 혹은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을 보면 그 순간의 모든 감각이 새롭게 떠오르지만 흑백 사진은 그렇지 않다. 그냥 고요한 정적만이 느껴지고, 어떤 계절이든 서늘한 겨울의 냄새가 난다. '춥다'는 말이 엄살이 아니게 될 무렵, 숨을 들이켜면 비강을 지나 두개골 안쪽까지 얇은 살얼음으로 덮어버리는 그 시간의 냄새. 하지만 신기하게도 무채색 속에 온갖 계절이 들어 있다. 봄볕과 여름 뙤약볕을 구분할 수 있다. 환했던 낮과 어스름히 가라앉던 저녁이 보인다. 이따금 색이 깜빡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곧 여행을 간다. 필름을 몇 롤이나 가져가야 할지, 흑백 필름을 가져갈지 어떨지 아직 결정하지 못 했지만 아마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한두 롤 정도는 챙겨 넣고 있지 않을까 싶다. 시간이 지났을 때, 낯선 거리의 느닷없는 고요함을 내 방에서도 느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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