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판타시아와 하이퍼판타시아
구글에 '아판타시아 테스트'를 검색해 보면 크게 두 가지 부류의 테스트가 나온다. 하나는 빨간 별 상상하기, 하나는 사과 상상하기다.
눈을 감고 머릿속에 빨간 별을 상상해 보자. 무엇이 떠오르는가? 나는 새빨간 색의 2D 별이 가장 먼저 생각났다가, 곧 빨간색으로 발광하는 3D 형태의 별이 된다(태양 같은) 심지어 열기도 느낄 수 있을 것 같고, 그 별의 위치나 누구에 의해 발견되었는지, 사실은 어떤 별인지에 대한 스토리까지 달려가 버린다.
아주 최근까지만 해도 이런 게 보통인 줄 알았다. 아니 보통이라기보다는 당연하다고 할까? 머릿속에 무언가를 떠올려 보라고 하면 누구든 당연히 이미지를 떠올릴 거라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의 충격과 공포란. 소설을 읽으면서 장면을 상상할 수 없어 몰입할 수 없다는 경험담을 읽었을 때의 쇼크란.
아판타시아는 간략히 말해 머릿속으로 이미지화 할 수 없는 사람을 말한다. 예컨대 '빨간 사과'를 떠올려보라고 했을 때, 빨간색이 뭔지도 알고 사과가 뭔지도 알지만 그 빨간 사과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오르지는 않는 사람이다. 아니…… 그렇다고 한다. 사실 이게 어떤 느낌인지, 머릿속에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조차 몰라서 정말로 실존하는 건지 여전히 의심이 된다. 하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이 증후군을 앓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더라.
나는 아판타시아와 거리가 멀다. 말하자면 하이퍼판타시아에 가깝다. 하이퍼판타시아는 머릿속으로 이미지화가 매우 잘 되는 사람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기억할 수 있는 반경 안의 기억은 언제 꺼내와도 영화처럼 생생하게 재생할 수 있다. '~를 상상해보라'고 하면, 위에서도 말했듯 스토리까지 달아버린다.
뭐가 더 좋다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내 경우는 하이퍼판타시아에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온갖 정신적 고통에 시달려 왔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이 많은 사람은 십중팔구 우울하다. 생각을 구체화시키면(예컨대 글로 쓰거나) 스트레스를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의견도 있지만, 구체화시키는 사이 스트레스 요인이 계속해서 내면화 되기 때문에 좋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그런데 나 같은 상상 과잉 인간들은 구태여 연필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지 않아도 온갖 생각이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돌아가시지도 않은 부모님의 장례식장의 풍경을 볼 수 있고 조문객의 얼굴을 볼 수 있고 심지어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아프지도 않으면서 시한부가 된 내 병실의 창문 밖을 볼 수 있고 담당 의사나 간호사의 표정을 볼 수 있고 심전도기의 소리를 듣고 소독약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물론 이미지는 8K로 재생된다. 최악의 상황일수록 너무나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다. 현실적인 것부터 비현실적인 것까지, 과거의 일과 미래의 일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구체화 되면서 계속해서 내면화 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우울증에 안 걸리면 그게 더 이상하다. 대체로 사람은 성취보다는 실패를, 행복한 순간보다는 불행한 순간을 더 강렬하고 오래 기억하니까. (아닌가? 대체로 반대인가?) 뭐, 나는 그렇다.
우울에 시달려 몸부림 칠 때 내 친구 신도시 체리파이가 이런 얘기를 여러 번 해 줬다. "너는 너무 생각이 많아. 잡다한 생각을 그만 해. 생각을 그만 해."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실천이 안 됐다. 머릿속에 꺼지지 않는 스크린이 있고 계속해서 불행해진, 끔찍해진 내 모습이 생생하게 재생되는데 어떻게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뭐 결국 해답은 약이었다.
발전한 현대 의학의 화학적 무언가가 나에게 드디어 스크린 관리 권한을 주었을 때의 그 감각이란.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실행할 때마다 여전히 놀란다. 생각을, 그 이미지를 끌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내 삶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모른다. 내 머릿속의 이미지로부터 벗어나는 해방감이란.
하지만 동전의 양면이 있듯 이 상상 과잉이 나쁜 점만 주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상상 과잉 인간이기 때문에, 머릿속에서 나온 상상으로 밥을 벌어먹고 살고 있으니까. 이 주제로도 글을 한 편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지금 막 들었다. 고마워, 내 부지런한 스크린아.
이미지를 떠올리기 힘든 사람으로 딱 하루만 살아보고 싶다. 궁금하다. '~를 떠올려 봐'라고 했을 때 이미지가 아닌 텍스트로만 떠오르거나,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 어떤 감각인지 알고 싶다. 소설을 읽으면서 풍경과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이 어떤 경험인지 느껴보고 싶다. 뭔가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는 느낌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