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억들은 그냥 스쳐 지나가게 하고 싶기도 해
성능 좋은 디지털 카메라는, 혹은 요즘은 휴대폰 카메라 정도만 되어도 빠르게 달리는 차 안에서 바깥의 풍경을 정확하게 잡아낼 수 있다. DSLR이라면 중급기 정도로는 올라가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그런 기능 말이다.
하지만 필름 카메라로는 절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이따금 운이 좋아서 괜찮은 컷이 찍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것들은 이게 뭘 찍은 건지, 어디서 언제 찍은 건지 구분할 수 없는 사진들이 되어 버린다.
누군가는 그런 사진을 보고 '실패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난 가끔 그런 사진들만 골라 보고 있고 싶을 때가 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버스 안에서, 전철 안에서 바깥을 향해 찍은 것들. 셔터를 누르는 그 순간 내 눈에 보였던 풍경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그런 사진들을.
말하자면 이런 것들.
이런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셔터를 누르던 때의 그 순간보다, 오히려 달리는 차 안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었던 그 묵직한 감각의 순간이 더 선명하게 떠오른다. 형체 없는 그 감각에 손목과 손가락이 뻐근해지는 동안 생각을 한다. 그냥 두었더라면 아무렇지 않게 스쳐 지나갔을 것을 기어이 이렇게 멈추어 있는 형태로 남겨두었구나. 마치 내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기억들처럼.
누구에게나 그런 기억이 있을 것이다. 굳이 붙잡아 두지 않았으면 좋았을 기억들이.
하지만 참 이상한 일이지, 오랫동안 소중하게 보관하고 싶은 기억보다도 붙잡아 둘 필요가 없는 기억들이 훨씬 더 오래 가는 것을 보면. 연인과 함께 손을 잡고 여름밤을 산책하던 시간, 그 골목의 모습과 습한 공기, 냄새, 맞잡은 손의 감촉 같은 것들은 자꾸만 휘발되어 가지만 그 연인과 서로 할퀴고 상처를 주며 싸웠던 일들은 마치 어제의 일인 양 또렷하게 떠올라 나를 괴롭히기도 하는 것을 보면.
머물러 주었으면 하는 기억들을 사진으로 찍어 남겨둘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흘려 보내고 싶은 기억들은 스쳐간 피사체들처럼 두루뭉술한 선으로, 점으로, 빛으로만 남아 이게 무엇이었나 궁금해 하다 웃고 치워 버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혹은 그 부정확한 형태 속에서 엉뚱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새벽이 밝으면 슬그머니 사라지는 별처럼, 렌즈 너머로 스쳐가는 알 수 없는 피사체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떤 기억들은 그렇게 스쳐 지나가도록 놓아두고 싶다. 붙잡지 않고 싶다. 빛이 드리운 자리도, 그늘진 자리도, 어두운 구석에 숨은 물웅덩이와 그 속의 뱀과 바람의 등 위로 덧없이 미끄러지는 나뭇잎의 곡선도 아무 것도 확인할 수 없도록. 어렴풋하게 뭉그러진 무언가로만 남도록 하고 싶을 때가 있다.
nikon fm2, minolta X-700
ektar 100, potra 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