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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Mar 17. 2020

오네긴은 정말로 나쁜 남자였을까?

내 맘대로 읽는 러시아 문학,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

『예브게니 오네긴(Евгений Онегин)』은 푸시킨이 가장 생기 넘치던 젊은 시절에 쓴 작품이라고 한다. 이 작품이 쓰인 시기는 푸시킨의 창작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라고 일컬어지는 '볼지노의 가을'이다. 1830년 약혼 이후 영지 '볼지노'에 요양을 하러 갔는데, 근처에 역병이 돌아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는 동안 다작을 했다고 한다.


부제 '시로 된 소설(Роман в ститах)'이 의미하는 바는 이 작품이 낭만주의(시 중심)에서 사실주의(소설 중심)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쓰였다는 것이다. 약강격의 강세를 사용해서 형식미를 드러냈다고 하는데, 번역본을 읽은 한국인으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러시아어로 문학 작품을 읽을 수 있는 수준이 되면 꼭 읽어봐야지.


오네긴은 정말로 나쁜 남자였을까?


「예브게니 오네긴」은 사랑 이야기다. 요즘의 표현으로는 흔히 ‘나쁜 남자’라고 일컬을 수 있는 남자 주인공과, 소설 같은 로맨스를 꿈꾸는 순수한 여자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 그 사랑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못한 이유는 두 사람이 보여주는 사랑의 양상이 서로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오네긴과 타티야나 외에도 또 다른 사랑의 양상을 보여주는 렌스키와 올가라는 등장인물이 있지만, 앞선 두 사람이 보여주는 사랑과 엇갈림에 비해서 단순하고 짧게 끝나버린 그들의 사랑은 달리 길게 논할 거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며 결혼을 약속했지만 연적의 등장(오네긴의 경우 연적으로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으로 남자가 죽게 되고, 슬퍼하던 여자는 곧 새로운 남자를 만나 결혼식을 올린다. 렌스키와 올가의 이야기는 단 한 줄로도 정리가 가능하다. 그러나 오네긴과 타티야나의 사랑은 한 문장으로 일축해버리기에는 여운과 생각이 많이 남는 이야기다. 이 글의 가장 첫머리에는 한 줄로 표현했지만, 그들의 사랑은 정말 그저 ‘나쁜 남자’와 ‘순수한 여자’의 사랑이야기일 뿐일까?


영화 오네긴(2000) 속 주인공 예브게니 오네긴의 모습


사교계의 소문도 보스턴 게임도
사랑스러운 시선도 파렴치한 탄식도
그에게 감동을 주지 않았고
그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1장 38연 중


한 때 페테르부르크의 사교계를 날아다니던 젊고, 잘생긴 귀족 청년은 인생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 시끌벅적한 무도회, 아름다운 여인, 책 속의 지혜도 그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친척 아저씨의 유산을 물려받아 내려간 시골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네긴의 삶에 새로움이란 없고 인생은 지루한 일상의 반복일 뿐이다. 오네긴은 당시 귀족 청년으로서 겪을 수 있는 경험은 거의 다 해본 것 같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찾아서 해보았으니 삶에 환멸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 아름다운 청년의 우울증은 외적인 요인 때문이 아니라 내적인 요인 때문에 발생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무엇 하나에도 진득한 관심을 갖지 못한다. 영원한 것을 믿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도 경험해 보았기에 말하건대 열정이 부질없는 것이라 여기는 허영심, 순수한 사랑을 안타까워하는 독특한 오만함이 결국 그 무엇에도 오랜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는 우울증으로 번졌다고 생각한다. 오네긴에게 사랑은 잠깐의 강렬한 쾌락을 동반한 의미 없는 감정이다. 그러나 사교계를 통해 배웠을 그의 사랑은 진실한 것이 아니었다고 본다. 허영과 오만에 가득 찬 그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었겠지만 말이다. 오네긴은 감히 순수하고 변하지 않는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타티야나의 모습


오래전부터 그녀의 상상은
안일과 우수에 불타오르며
숙명적인 영혼의 양식을 갈구하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마음속의 고뇌가
그녀의 젊은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녀의 영혼은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를.
-3장 7연 중


창가에 기대어 앉은 젊은 아가씨는 왕자님을 기다린다. 운명이 다가왔을 때 문을 열어줄 준비를 하고 있던 이 아가씨는 우울증에 걸린 귀족 청년에게 첫눈에 반한다. 젊은 시절 그녀의 어머니를 눈물짓게 했던, 그녀를 매번 창가로 가게 했던 감상주의 소설들은 타티야나에게 속삭인다. 그는 너의 운명이라고. 책을 통해 사랑을 배운 타티야나는 지극히 순수하고, 뜨겁고, 영원한 사랑을 믿는다. 사랑에 빠진 그녀의 모습은 낭만적인 여주인공의 전형이 아닌가 싶다. 오네긴 앞에만 서면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그녀는 이 감정이 두렵기까지 하다. 견디다 못한 타티야나는 편지로 자신의 감정을, 사랑을 토해낸다.


타티야나는 거절당해도 좋다고 생각하며 오네긴에게 사랑을 전한다. 그녀의 사랑 고백은 희망과 두려움, 설렘과 불안이 동시에 담긴 순수함의 결정이다. 러시아의 영혼을 가진, 작가가 사랑해 마지않는 우리의 여주인공 타티야나는 그 같은 열정에 대한 대답을 기다린다. 어떤 대답이 돌아오든 자신의 사랑을 전한 것을 만족스럽게 생각하면서.


사랑을 마약 같은 것으로 믿는 남자와 순수하고 영원한 것이라고 믿는 여자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오네긴에게 타티야나의 사랑은 전에는 보지 못한 눈부실 만큼 순수하고 솔직한 것이지만 오네긴은 그에 부응할 자신이 없다. 오네긴에게 사랑은 매력적이지만 찰나의 행복일 뿐이다. 그는 그녀를 오래도록 사랑할 자신이 없기에 거절할 뿐만이 아니라 여전히 오만함을 가진 채로 설교를 늘어놓는다. 단 몇 년이 지난 뒤 자신이 이토록 우습다 생각했던 사랑에 목숨을 걸게 될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말이다.


이후 오네긴이 장군의 부인이 되어 사교계를 주름잡고 있는 타티야나에게 느낀 사랑은 진실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가 그토록 환멸을 느끼던 철없는 열정이었을 것이다. 아름답고 화려하고, 의연하게 변모한 그녀의 표면에 끌린 것이다. 나는 귀부인이 된 그녀에게 반해 열병을 앓는 모습을 보고도 오네긴이 참 한결같다고 생각했다. 타티야나가 오네긴을 받아줄 리도 없고, 이 사랑도 얼마 못 가 끝나겠구나 싶었다. 이야기가 그렇게 끝났다면 아마 큰 여운이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장 좋아하고, 내게 가장 큰 여운을 남긴 부분이 그 뒤에 이어진다. 타티야나의 차가운 반응을, 그녀를 향한 불타는 열정을 견디지 못하고 달려간 오네긴이 마주한 것은 자신의 편지를 손에 든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이다. 우아한 귀족부인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이 그 옛날 오네긴을 순수하게 사랑했던 아가씨가 거기에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오네긴은 그녀의 발치에 무너져 내린다. 나는 이때서야 오네긴이 타티야나가 제게 주었던 사랑의 의미를, 진실하고 변하지 않는 사랑의 의미를 깨달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고 후회는 부질없는 것이다. 여전히 오네긴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타티야나는 그 사랑 대신 현실을 택하겠다고 말한다.


혹자는 이 작품이 타티야나의 성장기라고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오네긴의 성장기라고 본다. 타티야나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깨달은 오네긴은 아마 평생 그녀에 대한 사랑을 접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우스운 사랑이야기이며, 오네긴은 얼마나 불쌍한 주인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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