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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Apr 07. 2020

결국은 사랑인 걸까?

내 맘대로 읽는 러시아 문학,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아들’

세대 간의 갈등이란 건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것인가 보다. 시대라는 게 일직선으로 흐른다고 믿든, 원모양으로 순환한다고 믿든 먼저 태어난 사람들과 나중에 태어난 사람들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간극을 가진 사람들이 부딪칠 때, 간극은 좁혀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고 또는 서로 한 치도 이해하지 못한 채 평행선으로 끝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투르게네프가 쓴 이 ‘세대 갈등’ 소설은 어떤 결과로 마무리되는가? 성격으로나 특징으로나 만만치 않은 두 등장인물의 갈등으로 얼룩진 페이지들은 어느새 풋풋한 사랑이야기로 뒤덮였다가, 카타르시스를 풍자한 것 같은 황당한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다 읽고 나니 세대 갈등은 온 데 간 데 없고 머릿속에는 ‘사랑’ 밖에 안 남았다. 그래서 나는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내 감상을 풀어보고자 한다.




그대가 찾아오면 난 너무나 슬퍼라.
봄이여, 봄이여, 사랑의 계절이여!
얼마나……

“아르카디!” 바자로프의 목소리가 여행 마차에서 들려왔다.
“성냥 좀 보내줘. 담뱃불을 붙일 게 없어.”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입을 다물었다. 약간 놀랐지만 다소 공감하면서 아버지의 시 낭송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아르카디는 얼른 주머니에서 은제 성냥갑을 꺼내어 표트르를 통해 바자로프에게 보냈다.
-3장 중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푸시킨이 패러디했던 낭만주의는 이 작품의 주인공 바자로프에게 철퇴를 맞는다. 자연과학을 공부하는 우리의 주인공은 그다지 친절한 성격은 아닌 것 같다. 이 젊은 니힐리스트(기성의 가치 체계와 이에 근거를 둔 일체의 권위를 부인하고 음산한 ‘허무’의 심연을 직시하며 살려는 철학적 견해)는 의사가 될 것이라 말하며, 귀족적이고 낭만적인 것을 싫어하는 동시에 그런 ‘경멸’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그는 친구 아르카디의 아버지 니콜라이가 아들이 돌아온 기쁨으로 읊는 로맨스를 무참히 끊어버린다. 이런 예의 없는 사람인 주제에, 이 소설 속에 나오는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그를 좋아한다. 처음에는 주변인들이 너무 착한 게 아닌 가 했는데 책을 읽을수록 납득이 되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고,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바자로프는 자신의 사상에 대해 흔들림 없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 사상의 내용이 어떻든 간에, 굳건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매력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유물론과 관념론, 과학과 예술, 실증주의와 낭만주의. 바자로프와 아르카디의 큰아버지 파벨로 대변되는 신세대와 구세대는 일직선의 양 끝에 선 채 서로를 노려보기만 할 뿐, 결코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지도 벌리지도 않는다. 이 소설 속 세대 갈등은 평행선을 달린다. 각 사상에 어설프게 발을 걸치고 있는 주변인들이 끼어들어봤자 갈등 양상에는 변화가 없다. 당시 러시아 사회의 세대 갈등을 유쾌한 필체로 보여주는, 그러나 소모적인 그들의 논쟁이 지루해질 쯤에 오딘초바라는 여자가 등장한다.


바자로프와 함께 회랑을 거닐던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와 ‘공통점이 너무 많았던’ 그녀는 확고한 사상적 기반을 가진 오만한 남자를 흩뜨려놓는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바자로프는 처음에 그녀의 미모 때문에 사랑에 빠진다. 지극히 그 다운 이유다. 그러나 그가 조소하던 ‘사랑’에 빠진 이후로 그는 이전의 그일 수 없다.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은 개구리나 딱정벌레가 아니라 오딘초바가 된다.


유물론과 니힐리스트의 선구자가 사랑에 허우적거리기 시작하자, 그 파동은 신기하게도 관념론의 대표자였던 파벨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바자로프가 오딘초바에게 반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페네치카에게 키스하는 일도, 바자로프와 파벨이 결투를 하는 일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자로프가 조금 더 오래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사랑’은 파벨에게 기폭제로 작동한다. 열렬하게 사랑했던 R공작부인을 닮은 페네치카가 희롱당하자 파벨은 바자로프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그들의 결투는 세대 갈등이 절정에 달함을 상징하는 것일까? 아니라고 본다. 결투 이후 니콜라이에게 둘러 댈 이유를 찾던 바자로프와 파벨의 말처럼, 결투는 그저 소모전의 종지부를 찍는 척 고상한 가면을 쓴 낭만주의일 뿐이다.


결투 이후 모든 일들이 빠르게 진행된다.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모든 관계가 정리된다. 바자로프와 오딘초바의 감정은 결실을 맺지 못한다, 파벨은 R공작부인을 사랑했던 젊은 날의 자신을 떠올리며 니콜라이와 페네치카의 사랑과 결혼을 인정한다. 아르카디는 카챠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런데 온통 사랑 천지로 마무리될 것 같았던 소설은 사랑으로 변질되어버린 사상을 품은 우리의 주인공 바자로프가, 그가 그토록 신봉하던 과학과 실증의 칼날 아래 허무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앞서 ‘카타르시스를 풍자한 황당한 비극’이라고 설명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바자로프는 시체를 해부하다가 해부용 칼에 베이고,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사망한다. 그가 추구하던 실증적인 과학은 종국에는 그에게 영원한 잠을 선사할 뿐이다. 이 오만한 유물론자가 자신이 신봉하던 사상에 의해 죽음을 맞는 것을 보며 누군가는 카타르시스를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투르게네프는 바자로프를 ‘긍정적’으로 쓰고자 했다고 한다.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작품 발표 이후 바자로프에 대한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나는 투르게네프가 황당한 비극을 통해 바자로프에 대한 존중을 보여준 게 아닌가 한다. ‘사랑’을 중요한 키워드로 넣음으로써 어떠한 사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바자로프가 그 ‘사랑’에 녹아들었음에도 유물론에 의한 죽음을 맞았다는 점에서 투르게네프는 ‘사랑’과 ‘세대(사상) 갈등’이라는 두 주제를 작품 속에 꽤나 그럴듯하게 녹여냈다고 생각한다.


소설의 가장 마지막 부분은 바자로프의 죽음 이후 다른 등장인물들의 생활을 묘사한다. 사랑을 이룬 이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오딘초바는 러시아의 법률가와 결혼을 한다. 그녀답게 사랑이 없는 대신, 안온한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결혼이었다. 모두가 만족스럽고 평온한 생활을 하는 와중에 변두리의 바자로프의 무덤에는 풀이 자란다. 가끔 그의 부모가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간다. 자연 속에 파묻힌 바자로프의 무덤에 대한 묘사는 앞선 모든 갈등이 무엇이었냐는 듯 안온한 화해를 암시한다. 투르게네프가 바자로프를 존중하지 않았다면, 그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결국은 투르게네프도 바자로프를 ‘사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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