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쉬운 줄 알았더니 머나먼 길이었다 8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단풍이 곱게 물들기 시작한 10월의 일요일, 태능은 산책 나온 가족들과 우리처럼 데이트를 하는 연인들로 북적였다. 마이카 시대인 지금이야 여자를 조수석에 태우고 야외로 드라이브를 하는 게 일반적이겠지만 가난했던 80년대 초의 연인들은 태능이나 창경궁 같은 고궁, 아니면 남산을 오르내리며 데이트를 했었고 다리가 튼튼하였던 그 당시 젊은이들은 데이트 자체가 걷는 것이었다. O 양과의 첫 데이트는 그렇게 태능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는 소나무 숲길을 나란히 걷다가 태능 구석구석을 탐방하였는데 사실, 태능은 왕릉이 있다는 것 외에는 별로 볼 것은 없었다.
단지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어서 코 끝이 상쾌한 피톤치드향을 맡으며 걸을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었는데 피톤치드향과 함께 어깨까지 내려오는 여자의 찰랑거리는 머릿결이 햇빛에 반사되어 나의 눈을 어지렵혔다. 태능 여기저기를 걷다가 다리가 좀 뻐근해서 벤치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중 O 양이 우리 회사에 오기 전에 출판사에서 근무했던 것을 알게되었다. 자연스럽게 책을 많이 읽어서 상당한 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지만 나는 책을 많이 읽지도 못했고 그나마 최근에 읽은 책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데미안, 등이 고작이었다.
반면, O 양은 조셉 콘래드의 "로드 짐"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같은 내가 듣도 보도 못한 책 제목들을 말하면서 이야기하면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O 양이 얘기했던 그런 책들을 좀 읽어 볼 걸 하고 후회했지만 어쩌랴? 무식이 죄인 것을... 물론, O 양도 내가 읽었던 책들은 자기가 학생 시절부터 알고 있던 것들이라서 자연스럽게 그 내용을 갖고 대화를 하였는데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대해서는 예상치 못하게 O 양과 열띤 논쟁을 하였다.
나는 법대를 다니면서 장래 희망이 유능한 검사의 꿈을 갖고 있던 가난한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가
사회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오로지 수전노처럼 돈을 모아서 그 돈을 수녀원에 갖다 바치려던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 것은 그렇게 큰 죄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등 나는 라스꼴리니코프의 행동을 두둔했던 것이다.
O 양!~사람들 생명의 가치가 누구나 똑같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의 물음에 O 양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럼 사람들 생명의 가치가 서로 뭐가 다른 건대요?
O 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즉시 대답했다.
당연히 생명의 가치는 누구나 같을 수가 없습니다.
예컨대, 대통령과 노숙자는 똑같은 인간이고 같은 생명을 갖고 있지요. 그러나 두 사람이 물에 빠져서 죽을 위험에 처해졌다고 생각해 봐요. 노숙자는 물에 빠져 죽든 말든 거들떠보지도 않고 경호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대통령을 구하지 않겠습니까? 왜 그럴까요? 노숙자의 생명보다는 대통령의 생명이 비교 불가 할 정도로 더 중요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같은 인간이라고 해서 그 생명의 가치가 동등할 수는 없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그래서 난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의 돈을 빼앗아서 자기가 훌륭한 검사가 되기 위해 돈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큰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여깁니다.
어차피 그 노파는 나이가 많아서 얼마 살지도 못할 것이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기도만 하는
수녀들이 살고 있는 수녀원에 노파가 자기의 전 재산을 갖다 바치는 것에 대해서는 굉장한 사회적 낭비라고 여겨요. 차라리 고아원이나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돈을 쓴다면 모르겠지만 전당포 노파는 단지 수녀원에 재산을 바치면 그 수녀들이 기도를 해 줄 것이고 그로 인해 자기는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기복신앙에 사로잡힌 천박한 한 노인에 불과했을 뿐이니까요.
나의 말을 듣고 O 양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목적만 좋으면 과정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공산주의자 같은 생각이군요... 그런 사고방식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에요. 인간의 생명은 그 어떤 사상에 의해 등급이 매겨질 수 없는 것이고요.
만약,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가 한 행동이 정당화된다면 그런 사회에서는 불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한 낮 무가치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데 언제 누군가에 의해 언제든지 죽임을 당 할 수 있는 공포 속에 떨면서 살아야 하는 사회라면 너무도 끔찍할 것 같아요.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켜서 유태인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놓은 것도 어쩜 자신들보다 열등하고 불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모두 없애버려야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결과 아닌가요?
사람들 생명의 가치는 다를 수는 있어도 사람들 모두 나름대로 사회적 역할과 가치가 있는 거예요.
라스꼴리니코프가 살해한 전당포 노파만 하더라도 만약 그 사람이 없었다면 돈이 급한 사람들이 어디 가서 돈을 융통할 수 있겠어요? 따라서 그 노파도 분명히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었어요. 단지 그 노파를 바라보는 라스꼴리니코프의 삐뚤어진 사고방식이 전 잘 못되었다고 생각해요.
법을 지켜야 할 미래의 검사가 오히려 법을 위반하고 살인이라는 큰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으니까요.
O 양은 역시 문학소녀답게 논리 정연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나의 말을 반박하였다. 그러나 나 역시 지지 않고 줄기차게 내 주장을 피력했다.
물론, 법을 지켜야 할 미래의 검사가 법을 위반해서 살인을 했다는 것은 분명 잘못됐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근데 말이죠... 라스꼴리니코프는 그 당시 부조리한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해서 정의로운 검사가 되려고 하였는데 지독한 가난에 쪼들려 제대로 대학을 다니기가 무척 어려웠지요. 그런데 전당포 노파는 자기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약간의 돈을 빌려주고 귀중품을 받아서 돈을 갚지 못하면 가차 없이 맡긴 물건들을 팔아버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수전노에 불과했단 말입니다.
그렇게 벌어서 축척한 큰 재산을 세상에 별로 필요치 않을 것 같은 수녀원에 갖다 바치겠다는 계획을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주인공은 그 노파의 재산으로 자신이 훌륭한 검사가 되어서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려고 했을 겁니다. 마치 남미의 혁명가"체게바라"가 부와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된 의사의 길을 버리고 부르주아들에 의해 핍박받는 힘없고 가난한 민중들을 위해 총을 들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내 말에 O 양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노파를 살해한 것도 모자라 아무 죄 없는 동생까지 죽인 라스꼴리니코프의 행위는 그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는 없어요. 세상 어느 누구도, 타인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라스꼴리니코프의 범행을 변호하기 위해 "죄와 벌"을 쓰지 않았잖아요.
O 양의 말에 나도 동의를 하였다.
그렇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가난한 법대생이었던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와 또 너무 가난해서 계모와 의붓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길거리의 여자가 되어서 뭇 남자들에게 몸을 팔 수밖에 없었던 가여운 소냐와의 사랑얘기를 주제로 한 소설이지요. 현실적으론 이루어지기 어려운 사랑이겠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사람을 두 명이나 살해한 라스꼴리니코프가 소냐라는 한 여성의 헌신적인 사랑을 통해서 서서히 인간성을 회복해 가는 과정을 소설로 썼는데 러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굉장한 감명을 받았지요.
그래서 "죄와 벌"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이 되었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와 쌍벽을 이루는 거장이 되었습니다.
첫 데이트 때부터 우리는 서로 생각이 달라서 티격태격하다가 불편한 마음을 갖고 다시 일어나 또 걸었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먹구름들이 몰려오는가 싶더니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소나기를 퍼부었다. 우산도 없었던 우리는 급히 비를 피하느라 어느 처마 밑에 기대어 서서 떨어지는 빗물을 보며 잠시 말을 잃었다.
문득, 중학교 때인가 국어책에 쓰여 있던 황순원 님의 단편집"소나기"내용이 떠 올라 O 양을 바라보며 말을 했다. O 양!~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마치 황순원 님의 소설 속 "소나기"주인공들 같네요? 나의 말에 O 양은 살짝 웃으며 그렇군요 하고 대꾸했다. O 양은 그 주인공들 나이가 몇 살인지 아세요?라고 묻자
O 양은"아마 11살, 12살 정도 되지 않았을까요"? 라며 대답하였다.그 어린 꼬마들이 과연 사랑이란 것을 알 수 있었을까요? 하고 다시 O 양에게 물었고 어린 소년, 소녀들일지라도 사랑은 알고 있었겠지요 어른들 같은 사랑의 감정은 아닐지라도요 라며
O 양은 미소로 답했다. 하긴... 우리 조상님들이 오죽했으면 "남녀 칠 세 부동석"이라고 했을까요? 하면서 나는 하하 웃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조금 전 까지는"죄와 벌"의 주인공을 놓고 옥신각신 하다가 어색해진 분위기였었는데 황순원 님의 "소나기"를 이야기할 때는 다시 얼굴이 밝아졌다. 퍼붓던 소나기는 금세 그쳤고, 구름 사이로 해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면서 비에 젖은 대지를 환하게 비쳤다.
점심때가 한 참 지났으니 배가 고파진 우리 두 사람은 태능을 나와서 레스토랑을 찾았지만 분위기 좋은 경양식집은 없었다.
여자와 첫 데이트 때는 레스토랑에서 돈가스를 먹는 게 정석처럼 여겨졌던 시대였지만 그런 곳을 찾지 못했던 우리는 할 수 없이 어느 중국집에 들어섰는데 나는 짜장면을 시켰고
O 양은 볶음밥을 주문했다. 그때 내가 왜 짜장면을 주문했는지 모르겠다. 여자와 첫 데이트를 할 때 면 종류는 먹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지만 그땐 내가 생각이 너무도 없었다.
식사를 하면서 O 양은 앞으로 나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물었다.
내가 두 살이 더 많으니 오빠라고 부르면 좋겠냐고 묻길래 호칭은 중요하지 않으니 그냥 편하게 부르라 하였고 회사에서는 서로 내색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우리들의 첫 데이트는 해가 떨어지고 어두워질 무렵에야 아쉽게 웃으면서 헤어졌는데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O 양의 아름다운 자태가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아 또 밤을 하얗게 보냈다. 설마, 낼 회사에서 만난 뒤 E 양처럼 또 나를 냅다 걷어차지는 않을 것이란 희망에 부풀었으니 잠이 올리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