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쉬운 줄 알았더니 머나먼 길이었다 7화
이제부터 꽃길인가?
사장아들에게 O 양이 태권도 유단자
라는 말을 듣고서 문득 1년 전 일이 떠 올랐다. 뒤늦게 태권도를 배우기 위해 도장에 다녔었는데 한 달 정도 다닐 때였던가... 사범이 갑자기 나를 앳된 여자아이와 겨루기를 시켰다. 상대는 15~16살 정도의 빨간 띠 여중생
이었는데 아니? 하필이면 왜 여자아이와 겨루기를 시켰는지 모르겠지만 남자니까 좀 높은 급수의 아이와 겨루기를 시켜도 상대가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비록 흰띠 초보자였어도 상대방은 자그마한 체구에 나보다 키도 훨씬 작고 몸도 호리호리했었기에 아 휴!~뭐 요런 애와 명색이 그래도 남자인 나를 대련시키게 하냐고 사범을 의아하게 쳐다보았지만 사범은 그런 나를 보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작고 연약한 상대라고 얕잡아 보았다가는 혼이 날 것이라 예견을 한 것이겠지. 그런 사범의 생각과는 딴 판으로 여자아이니까 내가 봐주면서 살살해야겠다 생각하고선 실~실 여유 있게 웃어가며 발을 위아래로 살 살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앞발 차기를 하거나 아이 얼굴 앞에 발을 휘~휘 돌리면서 약을 올렸다.
갑자기 눈앞에서 번개가 작렬하더니 앞이 깜깜했다. 여자아이의 뒤 돌려차기에 그만 턱 위 뺨을 맞고 바닥에 대짜로 뻗으면서 기절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작고 약하게 생긴 여자아이라고 방심했다가 아이의 전광석화 같은 뒤 돌려차기를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맞았으니 충격이 컸었겠지만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아이의 돌려차기 한방에 나가떨어져 개구리처럼 뻗어서 정신을 잃고 말다니... 너무 창피해서 그다음 날부터 나는 더 이상 도장에 나가지 않았다. 그 일로 나는 운동을 한 여자들에 대한 공포 비슷한 트라우마가 있었는데 갑자기 그날의 악몽이 떠오르면서 선녀 같이 보였던 O 양이 안성기 주연의"투캅스" 영화에서 빨간 미니스커트를 입고서 깡패들을 샌드백 패듯 마구 두들겨 패는 여형사처럼 보였다.
빨간 띠 자그마한 여자아이에게도 돌려차기 한 방에 뻗었으니 유단자라면 스쳐도 난 사망이여.. 에 효! 효!~~
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더 열심히 태권도를 배워둘걸... 하고 뒤늦은 후회를 했지만 무슨 소용이겠는가. 어떡하지... 그냥 이대로 포기해버려야 하나... 심각히 고민을 했었지만 큐피드의 화살이 깊게 박힌 내 심장에서는 O 양에게 대시했다가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불도저처럼 그대로 밀고 나가라는 울림이 고동쳤다.
이대로 O 양을 포기해 버리기에는 너무도 아쉬운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설령 그녀에게 대시를 했다가 또 차인다 할지라도 미련 따위는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지 잠시 고심하다가 J 양이나 E 양 때 방식이 아닌 전혀 다른 작업으로 대시하였다. 즉~이런저런 절차나 과정 필요 없이 그냥 만나자고 하는 것인데 때로는 이 방식이 더 효과적일 때도 있다. 나중에 여러 여자들을 만나본 결과 남녀의 관계는 교과서적인 방법으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때는 내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무조건 들이대는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식상한 말이겠지만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쟁취한다"는 논리를 O 양에게 그때는 유감없이 발휘했었다.
대시의 첫 단계, 그 당시 초콜릿의 대명사인"가 나 초콜릿"을 마트에서 하나 산 뒤 O 양 혼자 사무실에 있을 때 살짝 들어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 옆에 두고 나왔다. O 양에 대한 작업의 시작이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당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뜻이라는 것을 O 양이 모를 리 없었다. 과연, 내가 준 초콜릿을 그녀가 어떻게 하느냐가 가장 큰 관건이
었고 그것은 오롯이 O 양에게 달린 문제다. 만약 내가 건네준 쵸코렛을 그녀가 받는다면 가능성이 있겠지만,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면 여자에 대한
작업은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서 O 양이 있는 사무실을 슬쩍 보았더니 초콜릿은 없었다. 그녀가 내가 준 초콜릿
을 먹었다는 사실에 마음은 고무되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O 양이 내게 호감이 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나의 접근을 그녀가 거부하지는 않은 것 같았기에 가능성은 있어 보였다.
이제 나는 O 양에게 신호를 보냈으니 나를 보는 그녀의 눈 빛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전에는 서로 얼굴을 마주쳐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무덤덤했었지만 초콜릿 작업 이후로 그녀의 눈빛은 한층 더 부드러워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O 양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녀를 만나기 전에는
알 수 없었다.
나를 길가에 버려진 빈 깡통 걷어차듯 냅다 차 버렸던 E 양도 내가 사귀자 하기 전에는 잘 웃어주었기 때문이었다. O 양 역시 E 양처럼 나를 단순히 회사 동료 정도로만 여기고 있다면 그 깢 초콜릿 하나쯤으로 여자의 마음을 확인한다는 것은 "우물에 가서 숭늉을 찾는 격"이 될 뿐이다.
어떡하든 그녀를 만나야만 이 모든 의문이 해결될 사항이기에 나는 바깥에
나가서 공중전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네!~에스비 상사입니다!~ 하는 O 양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자 내 심장은 사정없이 요동을 쳤다. 우황청심환을 먹지 않고 O 양에게 전화를 한 것이 너무도 후회가 되었다. 긴장이 되고 떨려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고통을 느꼈지만 애써 억누르며 나 누구인데 이번 일요일 시간이 있느냐고 물었고 내 목소리를 들은 O 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요일 12시까지 어디에서 만나자 하였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수화기만 들고 있었다. 나는
O 양에게 일방적으로 만날 장소와 시간을 말하고선 전화를 끊었다. O 양이 나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겠다 일방적인 통보를 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과연 그녀가 약속장소에 나올지는 미지수였다. 이제 운명의 여신이 내게 미소를 지을지, 또다시 네 주제파악을 하라고 화를 낼지는 알 수 없다. 그저
O 양을 만나기로 한 일요일이 빨리 오기만 바랄 뿐이었고 그때까지는 아마도 내가 O 양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았다.
서로가 눈이 마주치면 행여 O 양이 불편해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었을까? 그녀를 만나기로 한 일요일 전 하루하루는 한 달,
아니 일 년처럼 느리게 흘러갔지만 드디어 O 양을 만나기로 한 일요일 아침이 밝아왔다. 역시나, 전날밤은 긴장과 설렘으로 또 밤을 하얗게 새워서 부스스한 몰골로 거울 앞에 서니 가뜩이나 작은 퀭한 눈이 그날따라 더 작게 보이는 낯선 사나이의 모습이 비쳤다. 거울 속의 비친 나를 보며 도대체 내가 무슨 용기로 O 양 같은 여자를 만나자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땐 내가 미쳤었던 것 같았다.
그래도 일방적이라도 약속을 했으니 내가 먼저 약속장소에 가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는데 만약 O 양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곳에서 나는 몇 시간이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자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니 이 얼마나 미련하고 바보 같은 짓인가? 그러나 우리 때는 이 방법이 통할 수도 있는 시대였다. 그렇게 말하면 상대방 여성은 큰 부담을 갖기 때문이다. 그때 O 양을 만나기로 한 장소가 어디였는지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종암동의 어느 버스 정류장이었던 것 같다. 80년대 초 당시에는 지금처럼 카페도 없었고 다방이 있었지만 난 그런 우중충한 곳에서 여자를 만나고 싶지 않았기에 만약 O 양이 약속 장소에 나오면 그녀를 데리고 태능으로 데이트를 가기 위해서였다. 연애를 해 본 남자들은 잘 알겠지만 여자와의 첫 데이트는 언제나 가슴 두근거리고 설렌다. 나중에 연애가 잘 되어서 자주 만나게 되면 그런 기분은 사라지고 편안한 마음으로 바뀌겠지만.
역시나... 약속시간이 지났어도 그녀는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지 않은가? 서로 합의된 약속이 아닌 나의 일방적인 통보에 불과했으니
O 양이 그것을 지켜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어느새 내 팔목에 차고 있었던 낡은 오리엔탈 손목시계의 바늘은 만나기로 한 12시를 넘어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2시간이나 기다렸는데도 O 양이 나오지 않으니 그녀에게 바람을 맞는 것은 기정사실일 것 같았다. 허탈했다... 그냥 이대로 바람을 맞는다면 앞으로 O 양을 어떻게 대할지 고민이었다. 계속 대시를 해야 할지, 아님 깨끗하게 포기할지, 10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지만 이것은
조선시대에나 통용되는 속담에 불과할 뿐이다. 10번 아니라 100번 찍어도 안 넘어가는 나무 수두룩하고, 심한 경우엔 아예 이민을 가는 여자도 있었다."10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이런 시대에 뒤 떨어진 사고방식은 하루라도 빨리 버리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것이다.
반면, 넘어갈 나무는 도끼날 한번 닿지 않아도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넘어가는 여자도 있다. 따라서, 여자를 만날 때는 이 여자가 어떤 스타일인지 빨리 파악하는 것도 큰 능력이다. 되지도 않을 여자 쫓아다니느라 황금보다 더 귀중한 시간과 정열을 허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시곗바늘이 2시 20분을 가리키자 이제 서 있는 것조차 힘이 들었고 다리에 쥐까지 나면서 발 밑바닥부터 허벅지를 거쳐서 뇌신경 꼭대기까지 강한 전기가 찌릿찌릿하면서 올라왔다. 이렇게 바람을 맞는구나 생각이 드니 기분이 정말 허무했다. 앞으로 10분만 더 기다려보다가 그래도 오지 않으면 집으로 발길을 돌릴 참이었다.
지금 젊은 친구들은 어떻게 사람을 길에서 2시간도 넘게 기다릴 수 있느냐 핀잔을 줄지도 모르겠지만
80년대 초 시절에는 남자가 여자를 2시간은 그렇지만 1시간 이상 기다리는 것은 보통이었다.
뭐~너만 그렇지 않으냐고 반문을 하면 그것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때, 문득 낯익은 얼굴이 멀리서 어렴풋이 보이는 듯싶더니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그토록 기린 목이 되도록 기다렸던 O 양이다. 그녀를 보는 순간, 내가 지쳐서 헛 것을 보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내 눈을 의심했지만 분명히
O 양이었다. 이런 감동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여자를 다리에 쥐가 나도록 기다렸다가 막상 여자가 내 앞에 나타났을 때의 기분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녀를 보는 순간, 내 눈은 또다시
혼란스러웠다. 몸에 꼭 끼는 청바지를 입고 나왔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항상 정장에 긴치마를 입고 사무를 보던
O 양이었는데 꼭 끼는 청바지를 입은
O 양은 전혀 다른 여자처럼 보였고 몸매가 좋은 그녀는 청바지를 입은 자태가 너무도 섹시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예쁘고 매력적인 여자가 나를 만나러 왔다는 것이 내가 지금 꿈속에 있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믿기지 않았다.
O 양은 내게 다가오면서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오래 기다리셨죠? 많이 늦어서 미안해요...
아 아 아니... 뭐 괜찮습니다 나, 남자가 이, 이 정도는 기다려야죠.
남자가 이 정도는 기다려야죠? 이런 얼빠진... 말까지 더듬으며 O 양에게 맆서비스를 날렸지만 어쨌든 그때 내 기분은 하늘을 날 것만 같았다.
사실... 오늘 나와야 할지 말지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회사에서 매일 뵙지만 이렇게 따로 만나야 할지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하니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네요..
O 양이 수줍게 웃으며 속삭이듯한 말에서는 그녀가 태권도유단자라는 위압감은 들지 않았다.
그저 20살의 아리따운 아가씨로만 보였기에 이런 여자가 운동을 했다는 것은 믿기지 않았다. 태권도를 연마한 여자들은 모두 터프할 것이다라는 생각은 편견이었다.
당연하지요!~저도 O 양에게 일방적으로 만나자고 한 것은 큰 용기를 낸 것이고요. 그런 무례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O 양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 보니 처음의 긴장 됐던 마음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고 역설적이
겠지만 이렇게 멋진 여자를 만나게 해 준 E 양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나를 길가에 떨어진 깡통 걷어차듯이 차 버렸기에 O 양을 만나게 되지 않았겠는가?"전화위복"이란 말이 이렇게도 가슴 저리게 느껴진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O 양과의 첫 단추를 잘 꿰었으니 이제야말로 내 앞길은 장미꽃 만발한 꽃길이 펼쳐질 것만 같은 착각? 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