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쉬운 줄 알았더니 머나먼 길이었다 6화
버스와 여자는 기다리면 오기 마련이다
내가 좋아했던 J 양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녀석에게 빼앗겼으니 나란 인간이 너무도 한심하게 여겨졌다. 그렇다고 이미 남의 여자가 되어버린
J 양을 되찾아 온다는 것도 부질없는 짓이다.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넘어간 여자는 강물 흘려보내듯 그냥 떠나보내는 게 순리인 것. 사실,J 양은 나와 사귄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일방적으로 쫓아다니며 좋아했던 여자였으니 헤어지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사이었기에 J 양 입장에서도 내게 미안해할 이유가 없었다.그 일로 더 이상 사내연애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회사 말고 다른 곳에서 여자들을 찾기도 어려웠다.길 가는 여자 아무나 붙잡고 만나자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아!~물론, 길가는 여자 쫓아다녀서 되는 경우도 있기는 하였다.
그 시절에는 스톡킹이란 용어 자체가 아예 없었으니 여자들이 남자에게
스톡킹을 당하다가 마음이 돌아서서 남자와 사귀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었고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 가면 온통 여자들인데 길 가는 여자 쫓아다닐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다시 또 회사에서 여자들을 물색했다. 그동안 내 주제 파악도 하지 못한 채 이쁜 여자를 쫓아다녔기에 이번에는 눈높이를 많이 낮추어서 만만해 보이는 여자들을 물색하던 중, E라는 아가씨가 눈에 들어왔다. J 양에 비하면 미모는 절대적으로 딸렸지만 수수한 외모에 나처럼 눈이 좀 작은 아가씨였는데 눈이 작은 여자는 일생에서 처음으로 대시해 보는 셈이었다.
전 회사에서 내 별명은 단추구멍이었을 정도로 눈이 작았던 나로서는 주로 눈이 큰 여자들을 좋아했지만 내 주제 파악을
하고 나니 눈 큰 여자,작은 여자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E 양 정도의 아가씨면 내가 대시해도 쉽게 사귈 수 있을 것 같은 착각? 에 빠져서 본격적으로 작업을 했는데 작업이란 게 별거 있겠는가? 슬쩍슬쩍 농담도 하면서 자주 말을 걸면 되는 것이다. 여자들은 칭찬에 아주 약한 편이라 소소한 것에도 칭찬을 해주면 무척 좋아한다. 가령, 예쁜 머리핀을 꽂고 왔다던가, 입고 온 옷이 세련됐다던가, 향수냄새가 참 좋다
든가,이런 말을 해주면 여자들은 대개 환한 미소를 짓는다.
이때 여자의 반응을 잘 살펴야 한다.
행여 나란 남자를 싫어할 수도 있는데 그런 여자들은 칭찬을 해 주어도 표정이 별로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E 양은 나를 싫어하지는 않은 것 같았기에 열심히 작업을 한 결과 그녀와 상당히 가까워졌다고 여길 즈음 동료들끼리 회식을 하는 기회가 왔다. 회사가 주최하는 회식이 아닌 회사 동료들끼리 함께 저녁을 먹는 자리였는데 회식은 보통 중국집에서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짬뽕이나 짜장면을 시켜놓고 튀김만두와 소주를 같이 곁들여서 웃고 떠들며 한두 잔씩 하다 보니 모두들 정신이 알딸딸할 정도로 취기가 올랐는데 E 양은 체질적으로 술을 거의 하지 못했다. 겨우 소주 한잔 정도 했을 뿐이지만 그녀는 많이 취했었다.
나 또한 술이 약해서 주량은 겨우 소주 반 병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E 양 정도는 아니었기에 회식이 끝난 후, 술에 취한 E 양을 집에까지 바래다주면서 용기를 내어 대시하자 E 양은 흔쾌히 나를 받아주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 웃으며 집으로 들어갔고 나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뛸뜻이 기뻤다. 이제 나의 옆구리를 채워 줄 여자가 생겼으니 마치 온 천하를 얻은 것만 같았는데 E 양을 바래다주고 집에 돌아와서도 너무 좋아서 잠조차 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E 양에게는 정말 정말 미안하지만 그렇게까지 좋아할 일은 아니었어도 그때는 J 양의 배신 때문이었는지 나의 대시를 받아 준 E 양이 너무도 고마웠던 것이다.
그렇게 온 밤을 하얗게 새우고 회사에 출근해서 E 양을 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의외로 E 양은 덤덤한 표정이었다. 나를 보고 밝게 웃어줘야 할 E 양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하니 나는 또 당황하였다.행여나 어제 그녀에게 잘 못 한 게 있었는지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실수한 것은 없는 것 같았지만 일을 하면서도 E 양 때문에 하루종일 신경이 쓰였고 퇴근할 무렵이 되자 E 양이 내게 오더니 차 한잔 마시자고 하였다. E 양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조금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퇴근 후, 그녀의 요구대로 다방에 앉아서 함께 커피를 마셨다. 한 동안 별말 없이 커피만 마시던 E 양이 내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더니 어제 있었던 일들은 없던 일로 하자는 것이다. 갑자기 뒷 통수에 커다란 함머로 한 대 맞은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게 뭐여? 결국 어제 내 고백은 안 받아 준다는 말 아닌가?
여자에게 오케이 사인을 받자마자 다음날 바로 차였으니 이건 뭐~삼일천하도 아니고 겨우 하룻밤 천하에 불과했던 것. E 양의 말을 듣고는 나도 쓴웃음을 지으며 그러자고 했지만 나의 자존심은 천 길 만 길 낭떠러지로 사정없이 추락했다.
내 주제파악을 한답시고 눈높이를 한참 낮추어서 만만하게 보이는 여자에게 대시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나는 이쁜 여자는 다른 놈에게 빼앗기고, 수수한 여자에게도 차이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취중 진담"이란 말이 있다.
취한 김에 자신의 속 마음을 드러내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과는 반대로 취해서 하는 말은 믿지 말라고도 한다. 사람이 술에 취하면 자신의 뜻과는 전혀 반대되는 말이나 행동을 하기도 해서 진실성이 별로 없기 때문이지.
나를 퇴짜 놓았던 E 양 또한 술에 취해서 나의 대시를 받아주었지만 아침에 깨어보니 아니었던 것이다. 나란 인간은 그저 회사동료로 친하게 지내는 것은 괜찮아도 이성적으로는 별로 사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자기 이상형이 아니었던 것.
남자나 여자나 자신에게 부족한 면을 채워 줄 수 있는 상대방에게 매력을 느끼기 마련인데
눈 작지, 키도 자라다 말았지, (키 165)
마른 북어처럼 비썩 말랐지(그때 몸무게 47킬로) 생긴 것도 장동건이나 배용준과는 전혀 거리가 멀지, (배용준보다는 개그맨 배영만에 가까운) 이런 남자를 술에 취해서 정신이 왔다 갔다 하는 바람에 대시를 덜컥 받아주고 말았단다. 그래서 이성 간은 서로가 술 취한 상태에서 만나는 게 아니다. 취하면 뇌신경들이 헷가닥 돌면서 오작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상대방이 모두 미남 미녀들로 보이기 마련. 어떻게 보면
E 양은 판단력과 결정력이 대단히 빠른 아가씨였다. 그랬었기에 나는 E 양에게 고백하자마자 빛의 속도로 차였던 것이다. 대시했다가 여자들에게 차여보았는가?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나쁜지 그 후유증은 사람에 따라서는 평생을 따라다니기도 하였는데 다행히 나는 좋지 않은 일들은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에 E 양에 대한 감정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는 한 동안 E 양을 볼 때마다 "순간의 선택=엄청 큰 쪽~팔림"의 후유증에 시달려야 하였다. 차라리 이쁜 J 양에게 대시해서 퇴짜를 맞았다면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겠지만 수수하게 생긴 여자에게 조차 차이고 말았으니 그때 충격은 거의 쓰나미급이었다. 그 이후로 회사에서 나는 E 양을 피해 다녔다. 사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태생이 밴뎅이었던 나로서는 그녀를 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나를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아서 눈을 마주치기도 부담스러웠다.
고래들처럼 오히려 아무 일 없다는 듯 호탕하게 지냈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밴댕이가 바닷물 모두
들이킨다고 고래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밴댕이가 고래처럼 산다는 것은 죽음을 초래하는 일이기에 나는 그저 밴댕이의 삶을 살 뿐이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러가자 내가 좋아했던 J 양도, 대시하자마자 냅다 나를 걷어찼던 E 양도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녀들이 내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서운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어차피 J 양은 다른 녀석의 여자가 되었으니 이제 나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아가씨였고, E 양은 볼 때마다 그녀에게 퇴짜를 맞았다는 사실에 마주치기 조차 불편했었는데 이제 볼 일이 없으니 오히려 더 개운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나는 E 양에게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E 양으로 말미암아 세상에는 쉬운 여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허전한 나의 옆구리는 계속해서 여자를 원했는데 그런 와중에 또 새로운 여자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마치 영화에서 주인공 남자가 여자를 마주쳤을 때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꽃잎이 휘날리는 장면이 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는데 그녀는 새로 입사한
경리직원 O 양. 회사 설립 때부터 일하고 있었던 경리가 퇴사를 앞두고 있어서 그녀를 대신해 채용한 아가씨였다. 퇴사할 예정이었던 선임 경리는 미혼이었음에도 큰 덩치에 검고 두꺼운 뿔테 안경을 썼고 외모도 거의 시골 아줌마 같았다.
성격은 유들유들하니 넉살이 참 좋아서 남자들의 온갖 낯 뜨거운 농담을 능청스럽게 잘 받아주곤 하던 여자였다. 그래서 남자직원들은 그녀에게서는 어떤 성적 매력도 별로 느끼지 않았는데 새로 입사한 O 양은 글래머하면서도 큰 키에 인물도 이뻤고, 무엇보다 눈이 큰 게 내 마음에 들었다.
화방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빗에 유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던 여자들만 보다가 잠자리 날개 같은 흰 원피스를 입고 사무실에서 얌전하게 앉아 볼펜을 굴리며 계산기를 두드리고 사무를 보는
O 양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보였다.
불과 몇 개월 전에 수수한 외모의
E 양에게 대시했다가 다음 날 사정없이 차여서 그 후유증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O 양은 E 양과 비교 불가 할 정도였고 내가 일방적으로 좋아했다가 다른 녀석에게 빼앗긴 J 양보다 더 이쁘고 매력적이라 나의 심장은 팔랑개비처럼 또 사정없이 요동쳤다.
남자가 여자에게 매력을 느껴서 대시하고픈 마음은 단 몇 초안에 결정된다. O 양을 처음 보자마자 나는 큐피드가 쏜 화살을 심장에 정통으로 맞고 말았는데 문제는, 나만 맞은 게 아니었다.
짓궂은 큐피드 녀석이 다른 남자들에게까지 화살을 마구 쏘았다는 사실. 그중에서도 사장님 아들 녀석이 가장 큰 나의 경쟁자였는데 명색이 사장 아들이니 회사에서 그 녀석의 지위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었다. 다른 남자직원들도 아닌 회사 사장아들의 강력한 경쟁을 물리치고
O 양을 차지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남녀의 관계는 그 어떤 수학공식이나 경제적인 논리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 묘한 감정이 전기처럼 흐르면서 인연이 엮이는데 그 전기가 누구에게로 흐를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사장님 아들 녀석은
O 양에게 작업을 걸어댔다. 회사에서 버스 정류장까지의 거리는 약 10분 정도였는데 퇴근 후, 사장아들은 O 양의 옆에 착 달라붙어 그녀에게 온갖 농담을 하면서 작업을 걸면 여자는 가끔 웃기도 하였다.
나는 그들 뒤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곤 하였는데 주 된 대화는 동네 건달이었던 사장 아들이 자신의 무용담들을
O 양에게 아주 자랑스럽게 떠 벌리는 내용들이었다. 사장아들은 실제 동네건달이었다.
비록 아버지가 자금을 투자해서 회사를 설립하는 바람에 나와 함께 직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지만 녀석은 영락없이 깡패들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다행히 나하고는 별다른 문제없이 잘 지내고는 있었어도 깡패와 함께 일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유쾌하진 않았다. 사장 아들의 온갖 작업에도 불구하고 O 양은 쉽사리 마음을 주지 않았는데 아마도 건달 출신이라는 게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장 아들이 내게 와서는 대단히 쇼킹한 말을 하였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귀를 의심하였다.
O 양이 태권도 유단자라는 것이다. 헉!~~ 태권도 유단자라니? 겉 보기에는 전혀 운동을 한 여자로 보이지 않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