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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동인 Dec 17. 2024

결혼? 쉬운 줄 알았더니 머나먼 길이었다 21화

여자들은 끊임없이 내게 왔다

인생에서 "만약"이란 등식은 성립하지 않겠지만 지금의 나였다면 나는 당당하게 꽃다발 들고 많은 할머니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모니카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을 것이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라는 말은 시대를 초월한 진리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 진리를 "모니카"에게는 발휘를 못했었는지 모르겠다.
이제껏 다른 여자들에게는 그렇게 차이고 나서도 꿋꿋하게 대시해서 "이화"같은 미인을 쟁취했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여자들에게 연거푸 두 번씩이나 차였던 나였기에 그때는 매우 소심해져 있었다.

인생이란 내가 계획한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모니카를 통해서 또다시 알게 되었는데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양로원에 발길을 끊은 지 꼭 일 년 만이었다.
무슨 일로 그곳을 가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모니카 또한 양로원 자원봉사직을 그만두었는데 할머니들께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인사차 들르면서 그때 둘이 아주 우연하게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모니카와 어색하게 눈인사를 나누었지만 나는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게 되었다.
비록, 그녀와는 인생의 타이밍이 비켜가는 바람에 스쳐 지나간 사이가 되었어도 그때까지 나는 모니카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는데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 말을 듣자 내 마음은 또다시 바닥에 떨어진 유리잔처럼 산산이 깨졌다.
두 사람 다 볼일을 마치고 나란히 양로원 문을 나와서 잠시 같이 걷게 되었을 때 모니카는 문득 내게 작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형제님!~~ 그때 왜 오지 않으셨어요...


모니카의 그 말은 벼락처럼 내 정수리에 내리 꽂혔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쫙~풀리면서 땅이 도는 것 같은 현기증이 났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모니카는 그때 나를

기다렸다는 것 아닌가?
그녀는 내가 당당하게 할머니들 앞에서 데이트 신청을 했었다면 흔쾌히 받아주려 했었는데
내가 오지 않자 크게 실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게다가 발길마저 갑자기 뚝 끊고 말았으니 나에 대한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지...
왜 이렇게 나는 여자에 대해서만큼은 되는 일이 없을까... 하고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되지도 않을 여자들은 그렇게 죽자 사자 쫓아다니고... 신께서 점지해 준 여자는 바로 코앞에서 놓쳐버리고...
모니카의 말을 듣고는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쓴웃음만 지어 보였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에게 차일 것 같아서 못 왔다고 이실직고라도 하란 말인가?

모니카와 헤어지면서 어색하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나의 가슴속은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그 동굴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휑~하니 지나갔다.
그 뚫린 가슴을 얼마나 시퍼렇게 멍이 들 정도로 주먹으로 쳐댔는지 나는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비가 오려고 하는 날이면  사정없이 기침을

해 댄다.~쿨럭!~쿨럭!~쿨럭!~~

모니카를 놓쳐버린 이후로 한 동안 나는 어느 여자에게도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약이라고 했듯이 모니카를 잊어버릴 즈음 32세가 되던 해, 또다시 거짓말처럼 내게 한 여자가 다가왔다.
"세실리아"라는 세례명의 그녀는 나보다 무려 9살이나 연하였고 성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리교사로 활동하였는데 하얀 피부에 나보다 키가 더 컸던 그녀는 남자들 누가 보아도 아주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남녀 관계는 과학적으로 만나게 되지 않는다 했듯이 그녀와 나는 절대적으로 서로 이루어지기 어려운 사이었지만 운명처럼 "세실리아"와 나는 서로의 말 몇 마디에 호감을 갖게 되었다.
나는 세실리아를 보고 처음부터 반해서 쫓아다니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둘은 너무도 쉽게  친해졌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사이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인연의 고리가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세실리아와 내가 연인이 된 것은 그녀와 함께 시외버스를 타고 대천으로 여행을 갔다 온 후부터였다.

바다 하면 당연히 동해 아닌가?
그런데 왜 동해도 아니고 서해인 대천해수욕장을 그녀와 함께 가게 되었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없어진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두 사람은 대천행 버스에 몸을 싣고 약 3시간 이상을 바다를 향해 달렸다.
여자와 가까워지는 것은 단연 스킨십이다.
버스 좌석에 같이 꼭 붙어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손도 잡게 되면서 밀착된 몸을 통해 전기가 흐르기 때문이다.
그 전기가 서로의 몸을 관통하면 의도하지 않아도 둘은 인간자석이 되기 마련이다.

대천 해수욕장을 가기 위해서는 버스터미널에서 또 두당 얼마씩 받고 바가지를 옴팍 씌우는 택시를 타고 가야 했다.
그렇게 도착한 대천 앞바다는 바캉스철이 아니어서 그런지 동해만큼이나 푸르고 깨끗했다.
파도가 일렁이는 푸른 바다를 보자 세실리아는 탄성을 질렀다.
내 나이 32세가 되도록 여자와 함께 바다를 간 것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햇빛에 반사되어 금처럼 반짝이는 백사장을 둘은 팔짱을 끼고 걷다가 갑자기 파도가 밀려오면
세실리아는 무섭다고 팔짝팔짝 뛰기도 하였다.

장난기가 발동했던 나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어서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리자 세실리아는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여자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던 나는 몇 바퀴 돌다가 그녀를 안은 체 백사장에 처박혔다.
나보다 더 큰 여자를 안고 넘어지면서 그녀의 가슴이 내 몸을 짓누름과 동시에 숨이 멎을 정도로 큰 압박을 받았지만 그 압박은 하나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몸을 부둥켜안고 바닷가 모래사장에 엎어져서 얼굴을 마주 보며 깔깔 거리며 웃었다.

너무도 행복했다 이렇게 큰 행복이 내게 올 줄은 전혀 몰랐었기에 그날은 내 인생 최고의 날이었고
고진감래, 새옹지마, 란 고사성어가 하늘에 떠 있는 태양만큼이나 찬란하게 빛을 발했던 하루였다.
단 하루였지만 세실리아와 많은 추억을 바닷가 모래사장에 남긴 뒤 우리는 다시 택시를 타고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나는 세실리아에게 사랑고백을 하면서 청혼을 하였다.
그녀 역시 당연하다는 듯 나의 청혼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그렇게 우리 둘은 순식간에 결혼을 약속한 사이로 급 발전하게 되었는데 그동안 많은 여자들을 만나고 헤어졌지만 세실리아처럼 처음 보자마자 호감을 갖게 되면서 단 시간에 결혼을 약속한 연인이 된 것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더구나 세실리아는 외모적으로 볼 때 내게는 너무도 과분한 여자였다.
마치 내가 22살 때 만났던 "이화" 같은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나보다 큰 키에 이쁘면서도 글래머 한 몸매를 갖춘 여자가 키 작고 외모적으로도 별 볼일 없는 나이 많은 남자의 연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또 매일매일을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과 같은 행복감에 도취되어 살았다.

지금처럼 핸드폰이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나는 공중전화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그녀가 근무하고 있는 은행에 전화를 하였는데 세실리아 역시 일하면서도 내 전화를 기다렸다고 하였다.
우리는 자주 만나서 데이트를 하였고 그녀와의 사랑이 무르익었다고 여길 즈음 세실리아를 데리고 어머님께 인사소개를 하던 날, 어머님은 그녀를 보자마자 손을 꼭 잡고 눈물까지 흘리시면서 좋아하셨다.
나를 제외한 두 형님과 막냇동생까지 결혼을 시켰지만 아쉽게도 세 며느리들 다 키가 작고 왜소했는데 어머님은 그게 참 못 마땅하게 여기셨다.

더구나 큰 며느리와 둘째 며느리가 사사건건 서로 미워하며 싸웠기에 그 모습을 보신 어머님은
키 작고 몸도 왜소한 며느리들이라서 마음까지 좁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서 싸우는 줄로 오해하셨다.
글쎄... 속 좁은 것은 그런 것과는 별로 관계가 없지만 어머님은 그렇게 믿으셨다.
그런데 셋째 아들이 데려온 며느리감은 이쁘면서도 키 크고 맏며느리감 같은 여자였으니
드디어 당신의 오랜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셨다고 감동까지 하셨던 것이다.

이제 장차 나의 장인, 장모가 되실 여자의 부모님들께만 결혼 허락을 받게 된다면
세실리아와 나는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게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하였던가.
부푼 마음을 안고서 세실리아와 결혼허락을 받기 위해 그녀의 집에 처음 들르던 날, 장인이 되실 그녀의 아버지는 나를 보자마자 끄응!~하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뒤로 돌아 앉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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