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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닥노닥 Jul 06. 2023

한 발 늦어버렸다

누군가의 존재가 필요한 당신의 마음에 모든 순간 함께할 수 있기를

결국 당신은 떠나기로 했다. 결정을 내렸을 때 당신의 마음이 얼마만큼 무너져 내렸을지 나는 감히 짐작할 수도 없겠지만, 당신과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 들여야 하는 나 역시 못지않게 마음이 무거웠다. 아직도 당신이 '이 직업이 평생의 꿈이었다'며 반짝이는 눈으로 이야기하는 때를 나는 잊지 못한다. 이 나이에 꿈이라니, 너무 순진하고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연속된 우연과 비자발적인 상황으로 이곳에 도착한 나와 달리 누군가는 의도된 노력과 자발적인 선택으로 이곳에 왔다니, 믿을 수 없는 놀라움이 내 마음에 아로히 새겨졌다. 이런 각인은 자존감이 미미했던 나에게 동경할 수 있는 누군가의 등장이 가져올 수밖에 없던 필연이었다. 목표 없이 사는 하루살이 같던 나에게 당신의 꿈이 온전할 수 있도록 지키는 것이 어느새 나의 목표가 되었다. 나는 당신의 꿈의 파수꾼이었다. 


파수꾼이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단 2가지.


1. 내가 당신이 이곳을 떠나게 될 이유가 되지 말 것
2. 내가 당신이 이곳을 머무를 이유 중 하나가 될 것

당시에 임신 상태였던 당신은 다른 팀원들보다 근무시간이 짧았지만 우려와 달리 순조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당신의 상황을 이해해 주고 기꺼이 도와주려는 팀원들이 언제나 당신 곁에 있었다. 그리고 당신은 언제나 최선을 다하며 호의에 안주하지 않으려 했다. 팀장으로서 나는 그런 당신이 안쓰러우면서도 고마웠다. 타인의 진심을 완벽히 알 수 없겠지만, '당신이 우리 팀으로 출근하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은근하고 오만한 짐작을 했었다. 적어도 나에게 그 순간들의 기억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당신은 불러오는 배에도 힘든 내색 하나 없이 회사를 다녔고 이윽고 10개월의 기다림 끝에 귀여운 딸 하나를 낳았다. 그동안 당신이 얼마나 아이를 바라왔는지 알기에 팀원들이 다 같이 아기용품도 선물해 주면서 진심으로 그녀의 출산과 휴직을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모두가 당신이 다시 돌아와 함께 일하게 될 날을 기약했다. 이후 나는 다른 지역으로 발령을 받아 함께 했던 곳을 떠나게 되었다.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가끔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지냈지만 멀어진 거리만큼 소식이 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흔하디 흔한 뭇사람들의 이야기처럼, 각자가 '먹고사는 문제로 바빴다'. 


2년이 지났을까? 당신은 나에게 퇴사를 하기로 했음을 알렸다. 많은 고민을 거듭했지만 당신은 아이를 키우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자신이 직장을 다님으로써 자식에게 소홀히 했다가 후회할 상황이 닥치는 것을 미리 두렵다고 고백했다.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저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고 응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와 자신의 꿈 사이에서의 선택은 당신에게 너무 쉬운 문제였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신의 큰 눈에 담겨있을 슬픔이 머릿속으로 그려졌고, 그런 당신의 모습을 내 머릿속에 담고 있는 나도 슬펐다.


그렇게 씁쓸함을 뒤로한 채 지내다가 어느새 그녀가 육아휴직을 마치고 완전히 퇴사를 하기까지 2달 정도가 남았었다. 나는 남은 날들을 곱씹으며 당신에게 건넬 말들을 고르고 골라 편지지 위에 꾹꾹 눌러쓰고, 당신의 마지막을 장식할 꽃다발을 주문하고 현수막을 제작했으며, 당시에 함께 일하던 사람들에게 그녀의 퇴사 소식을 전하면서 그녀가 이곳을 떠나는 길이 쓸쓸하지 않도록 해주기를 부탁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이곳을 떠나는 길이 서운하지 않도록 회사를 나가는 날 배웅을 해주고 싶어 연차를 썼다. 근본 없는 긍정의 힘 때문인지 당신에게 내가 간다고 미리 알리지 않았다. 


드디어 퇴사하기 2일 전 점심시간 즈음 전화벨이 울리면서 당신의 이름이 핸드폰에 떴다. 반가움이 너무 앞서 어떤 이유로 전화를 했는지도 생각하지 않은 채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의 목소리지만 여전히 당차고 밝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 당신이 전한 소식은 '지금 본사에서 행정절차를 마무리하고 나오는 길'이라는 것이었고, '완전히 마무리하고 팀장님이 가장 먼저 생각나서 연락을 했다'라고 했다. 직접 배웅해주고 싶었고 그렇게 계획하던 나였기에 황망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고, 잠시잠깐 적당한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이 직업에 대한 당신의 간절함을 알았기에 지금 회사를 떠나는 길에 당신이 느꼈을 헛헛함과 슬픔이 충분히 예상됐다. 생각보다 간단했을 자신의 마지막과 생각보다 초라했을 꿈의 마지막이 허무하고 공허했을 것이다. 그래서 꼭 가서 얼굴 보고 배웅을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는 당신이 그 모든 것을 마주하는 순간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했다. 파수꾼은 결국 구경꾼으로 전락했버린 것이다. 당신이 나의 침묵에 머쓱하지 않도록 함께 근무해서 영광이었다는 말 그리고 그 숱한 시간 동안 애써주어 고마웠다는 말을 얼른 건넸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이 혼자 마무리를 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당신의 생각보다 금방 끝나버린 당신의 18년이 절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는 걸 꼭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수화기 너머 당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조만간에 한 번 보자며 전화를 끊고 나서 한동안 나는 업무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순간에 한 발 늦어버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버렸다. 미리 한번 연락이라도 먼저 해볼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누군가는 자신의 삶도 버거운데 어떻게 타인의 구원이 되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사람들의 작은 행동도 누군가에게는 구원이 될 수 있음을 직접 느낀 후로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구원이 되기를 바란다. 구원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절대 혼자가 아님을 알게 해주는 '존재' 그 자체로도 충분하다 믿는다. 누군가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부축해 주는 것이다. 애초에 걸을 의지가 없는 사람을 부축할 수는 없다. 걸을 의지와 최소한의 힘이라도 있는 사람만이 부축을 받는다. 그조차 없는 사람은 아예 누군가에게 업히거나 들것에 실릴 것이다. 물론, 나는 당신에게 파수꾼은커녕 그 어떤 것도 해주지 못했고 구경꾼으로 전락해 버렸지만 지켜주려고 했던 마음까지 추락하지는 않았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지키려고 했던 마음만은 당신에게 가닿았을 것이고 공명했기를 바란다. 언젠가는 이번처럼 한 발 늦지 않고 내가


누군가의 존재가 필요한 당신의 마음에 모든 순간 함께할 수 있기를 

이곳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떠나는 당신에게 행운을 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나는 언제나 당신이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당신의 곁에 있을 것이다.

Ad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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