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상대로 국어사전
어떤 대상에 대하여 정성을 다하는 태도가 있다
한참 뒤늦은 일기.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행복에 겨운 느낌이라기보다는 퍽이나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직전까지도 최고의 속력으로 달리던 차가 무언가와 충돌하여 속도가 '0'으로 줄어든 것처럼 나는 모든 충격력을 아무런 외상없이 온전히 내부로 받아낸 듯했다. 기뻐할 힘도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무언가에 전력을 다했지만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어리석게도 알지 못했다. 하긴, 지금까지의 내 삶이 그러하지 않았나?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모르고 에너지를 쏟는 일. 마치 불나방처럼. 홀리듯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 나비와 달리 불나방은 볼품없고 사람들에게 성가신 존재가 되는 것처럼 나의 극진(極盡)함에 응답할 이는 결국 나밖에 없었다. 나에게 자의식 과잉은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일 것이다.
출국장의 문이 열리고 눈으로 바쁘게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다 마침내 닿게 된 엄마의 얼굴에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이 그저 머리로 엄마의 품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울음을 삼키며 겨우 내뱉는 목멘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당신의 기구한 삶에 나 역시 일조한 것 같아 미안했다.
2주 정도 한국에 있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꽃이 피길 기다렸다.
봄의 찬란함은 겨우내 옷깃을 여미며 견뎌왔던 시간의 결실과 같다. 사계가 없는 나라에서, 칼에 베이는 듯 시린 날들을 보내지 않은 내가 이렇게 봄을 맞이해도 될지 하는 생각에 마음을 뒤척였다. 염치없지만 나무들이 꽃을 피우기 위해 인내했던 고난의 시간을 아무런 대가 없이 향유하고 싶었다. 그럼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시들었던 내 마음도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들을 보면 동하지 않을까? 그래서 다시 힘을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었다.
이윽고 따뜻한 날씨에 벚꽃들은 서로 앞다투어 뽀얀 자태를 드러내었다. 어떤 기관에서는 한국의 유례없는 이른 벚꽃 개화시기를 보며 기후변화에 대한 경고를 했다지만 사람들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벚꽃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변덕스러운 봄바람은 꽃비를 내렸다. 마치 벚꽃 한 잎 한 잎마다 짧았던 스스로의 생에 대해 관중을 향해 커튼콜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찔하게 아름다운 커튼콜이 끝이 난 후 추위가 찾아왔고 하루아침에 벚꽃은 자취를 감췄지만 머지않아 방전됐었던 나도 전원이 켜졌다.
연약한 잎들의 낙하는 나에게는 저릿한 두드림이었나 보다.
어둠이 내린 공항에서 함께 떠나는 이들은 남은 사람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으로 다시 전화를 부여잡기도 하고 옆사람에게 헛헛한 마음을 토해내기도 했다. 이번에는 한 달도 안 돼서 돌아올 예정이니 마치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나는 함께 떠나는 이들을 물끄러미, 너무 축축하지 않게 바라볼 수 있었다. 게다가 봄의 싱그러움은 머금었으니 잠시잠깐의 이별은 꽤나 할 만할 것이다.
탑승을 안내하는 방송이 나왔다. 이제 정중히 작별을 고하러 가자.
참으로 뜨거웠던 1년, 함께했던 모든 것들에게.
사진: Unsplash의 Wengang Zh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