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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닥노닥 Sep 13. 2023

파란이 휩쓸고 간 그 자리에

내 일상대로 국어사전

파란(波瀾)

1. 잔물결과 큰 물결

2. 순탄하지 아니하고 어수선하게 계속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나 시련

3. 문장의 기복이나 변화. 또는 두드러지게 뛰어난 부분.


술이 아니고서는 진심을 토해내지 못하는 미련한 사람을 하나 알고 있다. 

세상에 빛을 보기도 전에 쌓아온 그의 벽은 가히 '새재'라고 불릴만큼 새도 날아 넘기 힘든 고개였다. 

사람 하나 보기 힘들만큼 높은 곳에 가냘픈 마음이 위태롭게 묶여있으니 흐르지 못한 마음을 대신해

울컥울컥 술을 목구멍으로 흘려보내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뒤늦은 짐작을 한다.


어느 날 이른 저녁부터 당신께서는 또 술에 기대고 있다는 걸 수화기 너머로도 알 수가 있었다.

술에 기대어 서서 당신께서는 나에게 연락이 뜸하다며 서운하다고 칭얼대셨다. 

불과 하루 전에 내가 전화해도 당신께서 받지 않았다는 생각에 억울한 마음에 항변해보지만, 

농담인지 진심인지 확인할 겨를도 주지 않고 당신은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어지러이 펼쳐내셨다.

내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은 당신 앞에 앉아 펼쳐진 모든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살피는 것이었다. 

다음 날, 다시 마주한 당신의 벽은 언제 그랬었냐는 듯 여전히 끝을 모르고 우뚝 솟아 있다. 


순간, 염려스러운 마음이 드러워졌다.

'당신이라는 바다에 수많은 파란이 닥치고, 끝내 그 모든 걸 이겨내었다하더라도, 파란이 휩쓸고 간 그 자리에 남아있는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이로 남아버리면 어쩌나.'

'철썩철썩 성실한 파도의 움직임이 우리가 당신이라는 바다의 모래 위에 새기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쓸어가고, 끝내 아무도 당신을 찾지 않았다는 오해를 하시면서 공허와 슬픔을 갖고 떠나시면 어쩌나.'

어쩌겠는가. 인간의 힘으로 파도를 막아낼 수는 없으니, 지워질 줄 알면서도 더 자주, 더 깊게 당신을 사랑하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새겨드려야지. 당신을 만나러 가야지.


사진: Unsplash의 BAILEY MAH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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