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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닥노닥 Oct 03. 2023

불행의 지평선

내 일상대로 국어사전

알싸하다

매운맛이나 독한 냄새 따위로 코 속이나 혀끝이 알알하다.


기나긴 추석의 소회를 묻노라면, 알싸한 맛이었다고 답하겠다. 


미시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아픔과 상처를 살아가겠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도 내 사촌 언니의 삶은 확실히 불행했다. 너무 흔해서 말하기도 민망한 평범한 '이혼', '가난' 그리고 비슷한 것들이 비릿하게 뒤섞여 있었다. 그 불행이 나와 언니가 유년시절을 공유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나, 어릴 적에는 그저 함께 어울리고 싶은 동경하는 언니였을 뿐 명백한 불행의 증거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세월은 흐르고 이게 자연스러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시쳇말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각자의 삶에 바빠 연락이 끊겼다. 그리고 작년 추석, 언니는 결혼 소식을 전했다. 이제 언니에게 꽃길만 있을 것이라 넘겨짚으며 마음속으로 간절히 행복을 빌어주었다.


그리고 올해 추석 언니는 다른 사람을 통해 이혼 소식을 전해왔다. 남편의 도박과 폭력으로 견딜 수 없었다고 했다. '좋은 사람인 것 같다'던 할머니의 말씀은 위태롭게 붙어있던 포스트잇이 힘없이 나부끼다가 갑작스러운 바람에 휙 하고 떨어져 나간 것처럼 간데없이 사라졌다. 감히 짐작할 수도 없는 언니의 지난 1년을 제사 후 설거지를 하며 듣고 있었는데, 마치 언니의 불행이 지워지지 않는 김칫국물 같아 발갛게 물든 접시를 애꿎게 더 박박 수세미질을 해댔다. 소용없었다.


한편, 윤하 님의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청량감이 느껴지는 일렉기타의 도입부와 보컬이 나오기 전에 점진적으로 쌓이는 짧은 순간의 비트는 단숨에 사람의 마음을 잡기에 충분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개념을 "이별"에 대입해서 가사를 썼다는 점이 이 노래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전형적인 시공간적 고정관념을 적용할 수 없는 우주라는 공간에서의 원리를 일상으로 가져온 탁월한 수고로움은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영역 같다. 사건의 지평은 "블랙홀의 중심으로부터 특정 거리 이내로 가게 되면 빛조차 빠져나올 수 없게 되는데, 에 빠져나올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가 결정되는 경계면"이라고 하면 정리가 될 수 있을까? 


내 생각과 마음은 언니의 소식에서 헤어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불행 역시 블랙홀과 같은 것이고, 언니는 이미 불행의 지평선을 넘어버려서 도대체가 빠져나갈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일까? 나의 삶도 누군가에게는 불행일 수 있고, 언니의 삶은 스스로에게는 행복일 수도 있겠다며 오만을 경계해 보지만 허술한 경비로 인해 나는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내가 타인의 삶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깨달아야 할 나이이므로 나의 가슴앓이의 쓸모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저 윤하님의 노래가사처럼 한동안은 힘들겠지만 모든 것은 옅어져 갈 것이고, 이것이 끝이 아닌 새로운 길 모퉁이일 것이므로 언니가 딛고 서있는 곳이 불행의 지평선 너머일지라도 저 미지의 공간을 의연히 넘어가길 바랄 뿐이다.


사진: Unsplash의 Jeremy Perk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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