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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닥노닥 Oct 07. 2023

투지, 영혼 그리고 이야기

내 일상대로 국어사전

정체성(正體性)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


나의 호기로웠던 목표에서 너무 멀어지는 것 같아 글을 쓴다.


"혹시 삼성家 이신가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당황하여서 왜 그렇게 생각하시느냐고 되물었더니, 내 사내 이메일 아이디가 3S이길래 혹시 삼성에서 이걸 따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그분들과 닮은 것도 같아서 그런 생각을 했다고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그날은 내가 그 부서를 떠나는 날이었는데, 내가 1년 동안 해외파견을 다녀온 걸 고려하면 이 사람은 이 궁금증을 2년 동안이나 속으로 간직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실소를 금치 못하였던 기억이 있다.


역사적으로 대중을 우민화하는 정책의 전형으로 3S 정책이 많이 언급된다. Sex, Sports, Screen의 앞 글자를 딴 이 정책은 대중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여 정권의 지배를 용이하게 하는 수단이다. 내 지난 삶을 통계적으로 볼 때 나는 종종 이 세상에 삐딱하게 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는 편인데, 이때도 3S가 갖고 있는 저 부정적인 의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만의 3S를 정의 내리고 그것을 추구해서 스스로가 누군가에 의해 '무지한' 혹은 '굴복하는'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고 싶었었다. 당시에 나는 스스로가 스포츠, 영화, 성인물과 같이 자극적인 것에 매몰되는 수동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굳게 믿었었다. 그리고 비로소 진정한 어른으로서 첫 발을 디디는 직장에 와서 만드는 아이디(ID)라는 것이 그저 로그인을 위한 수단보다는 Identity(정체성)이라는 다소 심각한 의미로 받아들였었기에 이름, 생일과 같이 타인이 부여한 것 혹은 내가 어찌할 수 없었던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었다.


그 결과가 바로 Spirit, Soul 그리고 Story였다.


투지, 기개(Spirit):

싸우고자 하는 굳센 마음, 씩씩한 기상과 굳은 절개


영혼, 정신(Soul):

사물을 생각, 판단, 느끼는 능력 또는 육체에 깃들어 마음의 작용을 맡고 생명을 부여하는 비물질적 실체


이야기, 서사(Story):

자신이 경험한 지난 일이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남에게 일러 주는 말

(어떤 사물이나 사실, 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하는 말이나 글이라는 뜻이 더 많이 쓰이긴 하지만 나는 그만큼 나의 이야기가 풍부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으로 저 단어를 가져왔다.)


이제는 새로운 플랫폼들과 자본주의의 심화로 인해 과거처럼 정권이라는 단일 주체가 아니라 다양한 주체들에 의해 전방위적으로 3S정책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음을 시인한다. 나의 투지는 꺾였고, 영혼은 말라갔으며, 이야기는 바닥이 나고 있다.

불굴의 투지를 갖고자 했으나, 굴복이 더 쉽다는 걸 깨달아버렸고,

깨끗한 영혼으로 살아가고자 했으나, 피로에 지친 육체에 지배당해 버렸으며,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반짝이는 생산자가 되어가고자 했으나, 남들이 만들어낸 실없는 농담들을 작은 창으로 힐끔힐끔 구경하는 빛바랜 소비자로 전락했다.

누구나 그렇게 산다고 넘겨짚고 싶지 않다. 어떤 이들은 분명 내가 추구하고자 했던 저 세 가지를 오롯이 지켜가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아이디를 만들고 7년이 지난 지금은 씁쓸한 자기반성을 하고 있지만 또다시 7년이 지난 미래에는 호기롭게 정해놓은 나의 정체성에 더 가까워져 회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진:  UnsplashCarson Ari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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