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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닥노닥 Oct 18. 2023

거기 누구 없어요?여기 사람 있어요!

내 일상대로 국어사전

미어지다

1. 팽팽한 가죽이나 종이 따위가 해어져서 구멍이 나다

2. 가득 차서 터질 듯하다

3. (비유적으로) 가슴이 찢어질 듯이 심한 고통이나 슬픔을 느끼다


나의 위로는 언제나 마음만 앞서서 정작 제 값을 하지 못함을 알면서도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지 않으면 그 또한 제 구실을 못하는 것 역시 알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나머지 미어진 마음 사이로 흘러나오는 말들을 서툴게 쓴다.


아프리카 사람에게 눈이라는 존재처럼 나에게는 사랑이라는 존재가 그리도 생소했을 무렵, 사랑은 이리도 마음이 미어지는 것이라고 어렴풋이 깨닫게 해 준 사람이 있었다. 잔인한 탐험가를 마주한 원주민처럼 예고도 없이 찾아온 낯선 통증에 한껏 경계심을 품었지만, 마음이 자리한 데를 몰랐던 나는 아린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꿎은 가슴만 쿵쿵 두드렸었다. 이 두드림과 두근거림은 각각 망치와 정이 되어 내 삶의 무늬를 슬픔과 고통으로 직조하듯 새겼고, 나는 속절없이 나의 터를 빼앗겨버렸다. 되찾을 의지도 희망도 모두 버린 채 당장에 촘촘히 짜인 저 그물에 걸려 허우적 댈 것이 두려웠던 나는 힘껏 그 사람으로부터 도망쳤지만 흔적은 지워내지 못한 채 자라나 버렸다. 


그렇게 돌이킬 수 없이 처연하게 길들여진 나의 마음은 눈 내린 시베리아 들판을 어슬렁거리는 승냥이처럼 슬픔의 자취만을 찾아 쏘다니며 아련한 뒷모습을 한 사랑만을 좇았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이 여정 속에서 항상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분명 도망친 건데, 왜 버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냐'라고. 그리 묻는 이에게 나는 '비겁했던 선택이 정의로운 결과로 되돌아온 것이 아니겠냐'라고 씁쓸하게 답했다.


하늘을 나르며 대지를 불사른다는 용의 존재처럼 사랑이 내 삶에서 이토록 희미해질 때쯤, 사랑이라는 게 꼭 마음이 미어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말 대신 꽃 한 송이를 내밀어 전하는 너를 만났다. 순진한 이를 찾아 허구한 날 전화를 울려대는 사기꾼을 대하듯 처음엔 단단히 부여잡은 마음을 네 전면에 내세웠지만 너 역시 나와 비슷한 삶의 무늬를 갖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나와 분명히 다른 건, 섣부르지 않고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기다릴 줄 알았던 네게 수많은 사람들이 위로받았다는 것, 도망보다는 인내와 대항을 기꺼이 선택한다는 것, 제 상처를 핥아대다가 주변을 놓치는 과오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상처에 매몰되지 않고 제 마음의 그림자를 바꾸어 다시 시작하는 너를 보았다. 허덕이는 나와 달리 극복하는 너를 보며 '결국 그림자를 바꾸는 방법은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것이구나.' 깨달았다. 어쩌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것 말고도 네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에 대해 할 말이 미어질 만큼 많지만, 네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 앞에 그저 아무개일 뿐인 나의 사사로운 경험은 한 줄 이력도 되지 않는다는 게 참 미안했다.  


거기 누구 없나요? 여기 사람 있는데...

- 모두가 고통의 반대편으로 도망쳐 내달릴 때 아직 끝까지 가보지 않았다면서 의연히 그것을 감내하다가 이내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극복할 수 있었을 때 떠나는 사람

- 언제나 책임감과 진중함으로 제 속을 미어질 정도로 가득 채웠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반짝 빛을 내고 동시에 별똥별처럼 세상 사람들의 속마음을 들어주는 사람

- 제 상처를 핥아대느라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누군가에게 스스로의 존재가 영감이 되어 그 누군가의 삶의 자세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던 사람

아주 좋은 사람.



정작 네가 내민 꽃 한 송이가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너는 알고 있으려나. 물론 꽃 한 송이에 매수당한 내가 널 오해하고 있는 걸 수도 있겠지만, 어느 누가 타인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본 그 모습이 결국 사람들이 널 바라볼 단면과 다르지 않을 것이고, 사람 사는 데 그만한 모습이어도 충분할 거야. 아니, 차고 넘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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