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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닥노닥 Oct 21. 2023

낭자한 가을의 낙엽들을 쓸어내며

내 일상대로 국어사전

낭자(狼藉)하다

1. 여기저기 흩어져 어지럽다.

2. 왁자지껄하고 시끄럽다.


 한자어로 '낭자하다'의 어근인 낭자는 狼(이리 낭), 藉(깔 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의역해보면 '이리가 잠자던 자리'라는 의미다. 이리가 깔고 자는 풀로 장난치는 것 좋아해서 머물던 자리는 나뭇잎 등이 너저분하게 뒤죽박죽 흩어져있다고 하여 만들어진 말이다.


고배(苦杯)

1. 쓴 술이 든 잔

2. 쓰라린 경험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호기롭게 응모했던 문학 공모전에서 고배를 마셨다. 공허한 마음에 시시각각 흐르는 구름에 안색이 변하는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글을 쓰는 일에 재능이 없다는 걸 많은 경험들이 반증해주고 있었다. 고등학교 동아리나 대학 입시논술, 심지어 타 사에서 진행했던 챌린지 그리고 이번 공모전까지 나는 글을 쓰는 일에서 남보다 더 인상적인 글을 쓰지는 못했고 차곡차곡 탈락의 경험들을 쌓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해서 스스로 그만둔 적이 없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내 글쓰기 실력을 냉철하게 바라보지 못한 나의 미련함에 기가 차면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 조악한 실력으로 논문을 써보기도 했고, 이제는 운 좋게도 브런치라는 공간에서 내 나름의 기록을 해나가고 있다. 


스스로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직업을 정해버려서 항상 마음 한편에 아쉬움을 갖고 있었는데, 오늘부로는 어릴 적 자기 탐구를 생략하고 어쩌다 직장을 얻게 되었지만 이렇게 밥벌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나도 모르는 새 나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이 굶주림의 기로에 서있던 거라니! 

조상님이 도우셨구나. 

이번 설날에는 맛있는 전을 구워서 제사상에 올려드려야겠다. 


이 시는 가을을 모르는 아프리카의 어떤 나라에서 가을을 생각하며 문득 떠오른 장면을 바탕으로 썼다.

은행잎과 단풍잎들이 낙엽이 되어 온 세상을 울긋불긋하게 뒤덮을 때 자동차가 한번 지나가면 낙엽들이 그 뒤를 따르는 모습이 꼭 천진한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고대(?) 소독차가 골목을 돌아다니며 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달릴 때 뭣도 모르는 아이들이 그 뒤를 졸졸 쫓아가는 모양새 같지 않은가? 그리고 가을의 서늘함과 그렇지 못한 색감 그리고 시간의 가열찬 흐름이 극적으로 와닿는 변화에 대한 생각, 무엇보다 그 길게 늘어뜨린 시간의 수평선 어느 한 지점에서 당신이 지금 머물고 곳은 옛날 옛적 어떤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던 어떤 곳일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상상말이다.

이해받을 수 없는 이 개념들이 내 머릿속을 헤집다가 '낭자하다'는 단어로 수렴되고 글로 쓰여졌다. 


그렇게 작성하게 된 지 시를 자랑스럽게, 아니 아니 아주 소심하고 조심스럽게 선보입니다. 

마침 가을도 무르익어가길래요.

그리고 절망하고 동굴 속으로 들어가기엔 오늘따라 날이 너무 좋네요.


낭자한 가을


애초에 희망조차 없었던 싸움으로 

검붉은 패색이 점차 짙어지던 나날이었다

크고 작은 전투들로 길거리에는 선혈이 낭자했고

형체 없는 적의 위협에 백성들은

서러운 울음소리를 남기며

생존만이 목적인 걸음을 재촉하였다


결국

하늘에 닿겠다는 호기로웠던 임금의 뜻은

추적추적 주검이 되어 도처에 수렴하였구나

차마 거두지 못한 길거리 수많은 넋의 한을 

언제나 다 풀어낼 수 있을까


누구도 잊지 못할 것 같던 강렬한 그 순간들도 

이끼 낀 망국의 잊혀진 역사가 되고

이후에도 무한한 사연들이 허무하게 스러져갔다


이제 어지러이 흩뿌려진 나뭇잎들은 

뿌연 연기를 내뿜는 소독차를 쫓는 아이들처럼

무심히 달리는 자동차 뒤를 부산스럽게 뒤따르고 있다


오늘

불현듯 내일의 겨울을 목도하고 있는 낭자한 가을이다



애정했던 나만의 가을, 낭자한 가을을 보내며 

That's the spirit!


사진: Unsplash의 Hans Isaac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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