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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닥노닥 Sep 24. 2023

본인 인증에 실패하셨습니다

내 일상대로 국어사전

이 글의 단어처럼 이 글은 꽤나 시답지 않고, 다른 글들과 달리 시답지 않음을 먼저 조심스럽게 알려드립니다.


시답다

1. 마음에 차거나 들어서 만족스럽다.('시답지 않다', '시답지 못하다' 구성으로 쓰인다)


별을 벗 삼아 출근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요즘에는 햇빛으로 온 세상이 밝아졌을 때 출근하는 것이 왠지 모르게 어색하다. 꽤나 재미없는 사람인 내가 주말에 출근하는 것은 그다지 손해도 아니다. 게다가 나의 느린 손과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내가 남들과 동일한 시간만큼 일해서는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 같다는 자각 때문에 그다지 억울하지도 않다. 


새벽녘 어둠의 쑥덕거림을 익숙하게 지나친다. 

누군가는 어둠이 무섭지 않냐고 묻는지만, "만약 귀신이 있다 하더라도, 누구에게도 꺼내놓지 않은 내 마음을 얘기하다 보면 귀신도 나를 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는 상대에게는 시답지 않겠지만 진심 어린 나의 생각은 어디에도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귀신의 출몰보다 더 무서운 일이 발생했다. 

출입문에 출입증을 댔는데, "인증 실패"가 계속 뜨면서 문이 열리지 않았다. 자비심 같은 인간미는 갖추지 못한 기계는 나를 해하지도 않았지만 통과시켜주지도 않았다. 사무실 건물에 있는 모든 RFID 인식기에 출입증을 대어보았지만 어디서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손해가 아니라고 해서, 억울하지 않다고 해서 기쁘게 출근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곳은 나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내가 해결해야 할, 해결하지 못했던 모든 일들을 생각하니 절망적이었다. 동시에 괜히 내가 거부된 것 같아 심술도 났다. 차에 기대어 북두칠성으로 추정되는 별을 보며 한참을 고민하다, 오랫동안 하지 못한 일을 하러 가기로 했다. 오늘의 해를 마중 나가기로 했다.


동해로 향하는 나의 차를 운전하며 "내가 '나'임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에 대해 심사숙고해 보았다. 

'덜 자란 나의 새끼손가락? 아빠로부터 물려받은 엄지손가락 단지증? 아니면 과도하게 큰 양쪽 귀?'


'아니! 무죄 추정의 원칙처럼 본인 추정의 원칙은 없는가? 열심히 하겠다는데도 못하게 하다니! 하긴 그 시간에 출입하려는 사람이면 의심해 볼 만도 하겠다.'는 맹목적인 분노와 빠른 인정도 해 보았다.


신도 엄마가 있다면 구름을 왜 이렇게 어질러 놓았냐며, 등짝 한 대 얻어맞았을 것이라는 되지도 않는 상상도 해 보았다.


그리고 웅장한 산들의 사이사이를 굽이굽이 달리며,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마을을 포근히 덮어주는 

안개들이 일출과 함께 사라지는 걸 보고, 신의 엄마는 '해'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이부자리를 개라는 '해'의 잔소리에 안개도 고이 개어져 치워 진 걸 거라고, 시답지 않은 짐작도 해 보았다.


아직 곤히 잠든 마을에 침입하는 낯선 이방인은 차창을 굳게 닫은 채로 Jay Z의 <Empire state of mind>를 틀어대며 예의 따위는 벗어던지고 아무도 없는 도로 위를 요란히 달렸다.


Ta da! 바다다!

바다를 정면으로 마주 보는 벤치에 앉아 파도를 응시했다. 그리고 이 바다를 건너면 나를 걱정해 주는 내 친구가 있는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가 있겠다는 생각에 미쳐 휴대폰을 꺼내 친구에게 한국의 바닷소리와 풍경을 찍어 보냈다. 가을이라는 계절의 명성에 걸맞게 날씨마저 적당한 날이었는데, 특히나 이곳은 시원한 바닷바람과 따뜻한 햇살로 시원하지만 덥지 않았다. 내 앞에서 철썩이는 파도처럼 시답지 않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서 밀려왔다가도 사라지기를 반복하기를 여러 번. 어젯밤에도 군밤을 파셨던 아주머니는 오늘 하루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수레에 둘둘 말아놓은 방수포를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시간이라는 건 파도와 같아서 모든 이들의 삶을 언제나 무자비하게 쳐들어온다. 온 힘을 다해 시간에 깔리지 않기 위해 도망쳐봐도 살면서 일어나는 대비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로 인해 적어도 수 번은 진격하는 시간의 흐름에 깔릴 수밖에 없다. 요즘 내가 느끼는 압도감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고,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돌아가 몸을 일으키고 발을 굴러대는 것일 것이다. 그렇게 오늘의 나는 해를 마중하러 나왔다가 그 해의 다독임을 받으며 내 시답지 않지만 애정 어린 일상으로 다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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