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닥노닥 Jul 09. 2023

변수(變數)에서 상수(常數)까지

대상영속성에 대하여

북적이다

: 많은 사람이 한 곳에 모여 매우 수선스럽게 들끓다.


아버지의 형제는 그 시대의 여느 가정과 다르지 않게 대가족을 자랑한다. 무려 7남매. 출산율이 0.78명에 불과하다는 통계수치를 가진 국가의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는 그게 보통이었다. 남매들은 자라서 결혼을 했고 자식들을 낳아 할머니댁에 모이곤 했는데 오늘날의 지하철 9호선과 비견될 만큼 집이 북적였다. 집안 어른들 전체적으로 술을 좋아해서 명절에는 맥주가 박스채로 준비되어 있었고, 고생스럽게도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에서는 맛깔난 안주가 비워질 틈도 없이 만들어졌다. 한 병, 두 병 비우면서 사람들의 얼굴에는 홍조가 띄워졌고, 알코올의 농간에 사람들은 허튼소리도 했다가 그 소리에 웃기도 하다가 문득 떠오른 내일에 서둘러 작별을 고했다. 7남매도 개인공간이라고는 보장받지 못했던 그곳에 수십 명이 모이고, 게다가 아직 어린아이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넘나들며 그들만의 놀이를 했었으니 말 그대로 사람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이것이 나의 미화된 어릴 적 단면 중 하나다. 


변수(變數)

: 어떤 상황의 가변적 요인


여전히 할머니댁의 입구는 검은색 철문이 열린 채로 남아있지만 그 밖에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대문으로 들어서면 할머니께서 심어두신 고추가 주렁주렁 열려있었고, 음식재료 하나가 아쉬운 우리 어머니는 티 나지 않게 고추 서리를 해갔었지만, 노쇠하신 할머니는 더 이상 고추를 기르지 않으신다. 안타깝게도 누군가는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은 장성하여 각자의 가정을 꾸렸으며, 씁쓸하게도 흐른 세월만큼 오해는 수북이 쌓여 서로 간의 앙금이 쌓이기도 했다. 할머니댁은 더 이상 예전만큼 북적이지 않았다. 어느 좁다란 골목 안에 자리 잡은 우리 할머니댁은 과거 찬란한 번영의 역사를 가졌던 어느 왕조의 옛 궁궐터처럼, 그리고 우리 할머니는 그 위에 남아있는 이끼 낀 석비처럼 단단하게 남아있지만, 그 시절의 영광을 기억하는 자는 세월의 무정함에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모든 게 영원할 것 같았던, 상수처럼 보이던 그 어린 시절의 풍경은 이제 변수로 가득 차버렸다. 삶은 변수들의 점진적 증가, 고차원 방정식의 미로에 갇히는 것과 같다. 때로는 변수가 결혼이나 출산과 같은 기쁜 소식 혹은 정해지지 않음으로써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일수도 있겠지만, 낮은 출산율과 혼인율의 나라에서 그나마 기쁜 변수는 매우 드물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가능성의 중독에 빠져 헤매고 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상수(常數)

: 정해진 수 혹은 일정 상태에 있는 물질의 성질에 관하여 일정량을 보이는 수


변수가 여전히 변수일 때는 괜찮다. 무서운 건 변수가 상수로 바뀌는 순간이고 내가 아는 한 그건 죽음뿐이다. 할머니는 작년에 앞집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오랜만에 얼굴을 내민 손녀에게 전하며 점차 사람들이 떠난다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삶보다 죽음에 가까운 사람이 무덤덤하게 내뱉은 말이 내 가슴을 짓눌렀다.


대상영속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어떤 사물이 눈앞에 없어져 보이지 않더라도 사실상 없어진 것이 아니라 어딘가 존재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대상영속성 개념은 보통 아이가 생후 10~12개월 정도에 이르렀을 때 갖게 된다. 그래서 어떤 존재가 항상 그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아이들은 '까꿍'하는 장난이 그들 눈에는 마술과도 같이 보이기 때문에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다. 생후 10~12개월은커녕 10~12년을 훌쩍 넘은 어른들은 이제 안다. 눈앞에서 사라지더라도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음을. 다만 이해와 수용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기에 받아들이기 힘들 때도 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그 상실을 수용하지 못하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응시한다. 얼마나 어른이 되면 우리들은 죽음의 대상영속성을 수용할 수 있을까? 


결국 변수에서 상수로의 여정(旅程)에서 내가 항상 갖춰야 할 마음가짐은 i) 우리네 삶은 변수들의 집합이나 언제든 상수로 변할 수 있다, ii) 그 순간이 오더라도 소멸한 것이 아니라 어딘가 항존(恒存)하므로 너무 오래 절망하지 말 것, 이 2가지일 것이다. 


주말에 오랜만에 본가에 들러 부모님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오고 가는 술잔 속에 나는 여전히 어린 자식이었고, 부모님은 그 자식을 품은 태산이었다. 오늘도 변수가 변수임을, 그래서 언제든 상수로 변할 수 있음을 행복의 틈 속에서 깨달을 때마다 이 변수를 더 단단히 붙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 시대의 마지막 무사가 되어 그 골목을 지키고 계신 나의 할머니를 그리워하며, 나의 할머니, 나의 부모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오래도록 우리 곁에 변수(變數)로 남아있길 바란다. 언제나 그들의 존재에 감사하며, 언젠가 그들의 부재에 적당히 슬퍼하길.



작가의 이전글 너무 신나서 까먹어버렸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