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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닥노닥 Jul 07. 2023

너무 신나서 까먹어버렸어요

네 빛이 일렁일 때가 정말 좋더라 

근무오프엔 영화지!

해외파견을 1년 동안 다녀오면서 회사에서 운영하는 당직근무에 투입이 안되고 있었는데, 귀국 후 새로운 지역으로 발령을 받으면서 다시 당직근무의 지옥이 다시 시작되었다. 스스로의 장점을 말하는 것에 주저하는 편이지만 어디서든 잠을 잘 잘 수 있다는 것 하나는 자신 있게 내세 울 수 있을 만큼 잠에 특출 났다. 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손으로 턱을 잠깐 괴고 있는 찰나의 순간에도 잠에 들어버릴 정도다. 장담하건대 내가 병에 걸린다면 당직근무가 거기에 어떤 방식으로 든 기여했을 것이다. 체질과 자연의 섭리에 정확히 반대되는 생활이며 나같은 사람에게는 특히 더 치명적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사장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겸허히 당직근무에 임해야지.


오랜만에 근무라서 긴장을 해서 그런가 몇 번 조는 순간은 있었지만 당직을 하면서 주간에 못했던 일도 몰아서 하고, 민원도 처리하고, 순찰도 돌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해가 밝아왔다. 첫 근무라서 그런지 당직근무자들이 작성해야 하는 간단한 서류를 작성하는 것을 깜빡했지만 그것 빼고는 대체로 무난한 근무였다. 다른 곳도 그렇겠지만 당직근무 다음날은 출근하지 않고 퇴근해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오프가 곧 해방과도 같이 느껴졌는지 내가 생각해도 가방만 홀라당 들고 뛰쳐나가듯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삐져나오는 웃음을 어쩌지 못한 채.


남들 쉴 때 내가 일하는 건 최악이지만,

남들 일할 때 내가 쉬는 건 짜릿하다. 늘 새롭다. 최고다.


그러나 문득 선배한테 간다는 인사도 안 하고 회사를 빠져나온 걸 별안간 깨달았다. 끓어오르는 도파민을 어쩌지 못한 내가, 산책을 나가는 강아지 마냥 뚱땅뚱땅 사무실을 빠져나왔다고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나름 직장생활도 7년 차에 접어들었는데 이런 거 하나 놓쳤다고 생각하니 스스로가 한심하기도 하고 전화로 말씀드리려니 반응이 예상이 되지 않았다. 살짝 긴장한 채로 전화를 걸어서 선배님께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빨리 퇴근하는 게 너무 신나서 선배님께 인사드린다는 걸 까먹어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선배님이 귀엽다는 듯이 웃으면서 '그렇게 신났어?'라고 물으며 푹 쉬라고 말씀해 주시고 전화를 끊으셨다. 같이 일을 시작한 지는 별로 되지 않았지만 나는 선배님이 좋은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내가 인사도 없이 퇴근한 걸 좋게 넘어가주신 것 말고 자기 일에 열정이 있어서 멋있다. 세월의 풍파를 맞으면서 사람들은 풍화되기 마련인데 선배님 여전히 부조리에 분노하면서도 (일만 열심히 한다면) 제 식구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편이다. 마치 방금 이 세상에 불시착한 것 같은 사람이다. 선배님보다 경력은 짧지만 세상의 모든 풍파를 혼자 다 맞은 것처럼 열정과 의욕을 잃은 나는 퇴근하자마자 샤워를 하고 영화관으로 달려갔다. 요즘 볼 영화가 많지는 않았지만 조조할인을 놓칠 수 없기에 친구가 추천해 줬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을 봤는데 대사 하나가 참 인상적이었다. 


네 빛이 일렁일 때가 정말 좋더라

나는 선배가 웃을 때가 정말 좋고 동시에 죄송한 말이지만 선배님이 세상에 분노할 때가 좋다. 선배님의 빛이 일렁이는 순간이다. 어느 날은 듣다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선배의 힘이 느껴진다. 분개에는 힘과 이성이 필요하다. 이성이 없는 분노는 떼쓰는 것과 같고 힘이 없는 분노는 불평/불만에 불과하다. 선배의 분노에는 힘도 이성도 모두 실려있다. 그런 사람을 아주 오랜만에 보아서 그런가. 반가움을 이루 말할 수 없나 보다. 아님 멋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스스로의 행운에 대한 충만함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선배님을 닮아야겠다는 뻔한 결말은 아니다. 아마 나는 이 선배처럼 될 수 없을 거다. 다만, 그 선배가 오래 온전한 모습일 수 있도록 내가 1인분이라도 해내야지. 다음부터는 '너무 신나서'라는 변명을 해야 하는 일이 없도록 신중하고 감정에 휩쓸리지 말아야지. 

오늘도 선배님한테 한 수 배우고, 한 번 더 반하면서 저는 이만 퇴근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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