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밤을 지나 분노는 되가져갑니다

내 일상대로 국어사전

by 노닥노닥


취하다(取하다)

1. 일정한 조건에 맞는 것을 골라 가지다

2.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지다

3. 어떤 일에 대한 방책으로 어떤 행동을 하거나 일정한 태도를 가지다

4. 어떤 특정한 자세를 하다


취하다(醉하다)

1. 어떤 기운으로 정신이 흐려지고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게 되다

2. 무엇에 마음이 쏠리어 넋을 빼앗기다

3. 사람이나 물건에 시달려 얼이 빠지다시피 되다



수많은 긴긴밤을 함께 했으니, 우리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했다

- 동화책 <긴긴밤> 중 -

동화책은 너무 잘 읽었습니다. 30살에 동화책을 선물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덕분에 제 책장이 특별해졌습니다. 동화책 선물이 실망이라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그저 요즘의 제가 어딘가에 사로잡혀서 헤어날 줄 몰랐었는데, 이 책 덕분에 잠시나마 거기서 벗어나 다른 생각들을 뭉게뭉게 피어내기도 하고, 제 마음이 한동안 두둥실 자유로이 떠다녔습니다. 감사합니다.


선배, 어느 해가 그러지 않았겠냐만, 올해도 정말 힘든 한 해를 보낸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이 익숙해질 줄 알았건만 여전히 저는 서툴렀고, 그런 저에게 세상은 쉽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올해의 첫눈이 내렸으니, 이제 곧 우리는 또 다른 새해를 맞이하고 나이를 먹겠죠. 시간이 정말 빨리 가는 것 같습니다.


선배, 선배가 준 동화책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을 향한 증오와 분노가 가득 찬 코뿔소가 어린 펭귄과 함께 바다를 찾는 여정을 시작하고 이내 죽음을 맞이하지만 어린 펭귄은 끝내 바다를 찾게 되는 이야기. 그러나 코뿔소는 마지막 순간 어린 펭귄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인간에 대한 증오와 불신은 감춰두고 다 괜찮을 거라며 안심시키고 다독이더군요. 아직 저는 아이도 없고, 결혼도 안 했지만, 언제나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책임을 다하는 것이 제가 부모세대로부터 받은 축복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그런가 코뿔소의 마지막 순간을 읽으며 생각이 많아졌고, 어른으로서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하는가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선배, 우리 의지는 물려주되, 분노는 되가져갑시다.

세상은 언제나 불공평했고 불합리했고, 아마 아이들이 맞이할 사회도 그럴 겁니다. 체념하거나 묵인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선한 사람들의 노력을 통해 시간이 지날수록 더 나은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노력으로 미약하나마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고, 앞으로 자라나 이 세상의 주인이 될 아이들의 마음이 분노로 불안하고 뜨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넘실대는 희망으로 두근대도록 하는거죠. 무엇보다 우리 분노에 휩싸여 세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행복과 기적을 지나치지 말자고요. 선배와 만났던 그날, 주홍빛 숯불에 고기는 맛있게 익어갔고요, 초록색의 소주병은 재빠르게 바닥을 보였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선배는 기분 좋게 취해서 저에게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하는 당위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어요. 저는 정말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취해서 하신 말이라고 하지만 저는 선배가 절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올 겁니다.

선배, 우리 땀은 물려주되, 눈물은 되가져갑시다.

그들이 살아갈 세상조차 쉽지 않겠죠. 그래도 우리 아이들에게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해줍시다. 그들의 이마에 땀이 구슬방울처럼 맺히고, 거친 숨을 내쉬면서 올라가는 그 길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좀 더 가면 탁 트인 절경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정상에서 부는 바람과 올라온 길을 되짚어보며 먹는 주전부리가 그렇게 달콤할 수 없을 거라고.

아직 봄이 오기엔 가을조차 가시지 않은 것 같은 오늘, 어설피 그들을 덮고 있는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당겨 덮어주며 안쓰러움에 목이 메더라도 눈물을 되가져갑시다.

아직도 저는 점심시간에 선배와 커피 한잔 하며 서로의 깊은 속내를 나누던 때를 선명히 기억합니다.

그리고 선배님과 한공간에서 일하던 순간들도 그립습니다.

언제나 선배는 저한테 우러러볼 수 있는 멋있는 사람일 겁니다.

지치지 않는 마음을 가진 멋있는 우리 선배님,

이 글로써 선배님이 주신 동화책에 대한 독후감을 갈음하겠습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사진: Unsplash의 Emerson Pe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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