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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유럽

'이토록 모범적인 여행'의 시작

by 미리


유럽은 늘 '언젠가'의 영역이었다



돈을 많이 벌면 언젠간 가야지, 시간이 나면 언젠간 가야지···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유럽 여행은 늘 달력 밖으로 벗어나 있었다. 20대 때는 왜 그렇게 유럽 여행을 사치라고 여겼을까. 시간은 많지만 돈이 없어서, 시간이 있는 만큼 돈을 쓰면 감당이 안될 것만 같아서··· 그렇게 애써 미뤘다.


어른이 되면 곧바로 떠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업무에 적응하느라, 해마다의 고충들을 마주하느라, 저축하느라 여유가 없었다. 은행 창구에 앉아서 유로 환전 업무를 할 때마다 여행 떠나는 손님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늘 그랬듯 '언젠간' 나도 환전하는 날이 오겠지를 꿈꾸었다. 유럽은 이처럼 내게 언젠간 풀어 볼 '선물 꾸러미' 같은 대상이었다.



'언젠가'의 미뤄왔던 숙제를 이번에 마침내 했다. 떠날 결심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올 하반기 장기 휴가 때는 꼭 가고 싶었다. 가야만 했다. 떠날 용기도, 마음의 여유도 이제는 있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안다. 낯선 곳을 여행하며 느끼는 행복을. 행복이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갈 때, 그곳이 이제는 유럽이었으면 했다.



첫 유럽으로 어디가 좋을지 고민하다 '동유럽'을 택했다. 돈과 시간 모두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유럽은 가게 된다면 엄마와 함께 가고 싶었기 때문에, 패기지 여행을 택했다. 유럽 여행까지만 해보고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를 하겠다는 동생도 함께. 그렇게 세 명이서 드디어 각자의 첫 유럽으로 떠날 결심을 했다.



패키지여행이어서 그런 지 여행 준비 단계가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큰 캐리어에 짐을 싸야 한다는, 두꺼운 옷도 챙겨가야 한다는 사실 외에는 신경 쓸 부분이 없었다. 숙박도, 여행 일정도 다 준비되어 있으니, 첫 유럽 여행이라는 설렘 하나만 온전히 마주해도 괜찮았다. 떠날 때도, 가서도 가볍게 하고 싶어서 캐리어에는 필요한 짐만 담았다.


필요한 짐 중에서도 먼저 챙긴 것은 책과 여행 노트였다. 유럽 여행을 계획할 때부터 챙겨가려고 아껴 둔 책이 한 권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손바닥만 한 노트 한 권도 챙겼다. 여행을 계획할 무렵 김신지 작가님의 《기록하기로 했습니다》책을 읽었는데, '여행지마다 한 권의 노트 쓰기' 부분이 인상 깊었다. 귀퉁이에 '이번 유럽 여행 때 시도해 봐야지'라고 적어두기도 했었다. 사진으로 여행을 기록하는 방법 말고도, 손글씨로 여행을 기록한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새로운 방식의 여행이 기대되고, 기다려지는 순간이었다.







새벽부터 부지런히 공항 리무진 버스를 타고,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의 공항은 붐비는 듯 고요했다. 스타벅스 북카페에서 카페 라떼를 마시며 책 한 권을 읽었다. 먼 길을 떠나는 여행객이 출발 전 시간을 보내기 딱 좋은 공간이라고 느꼈다. 다 읽어보지는 못해도 쌓여있는 책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를 포근함을 느꼈다. 기분 좋은 출발이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까지는 14시간이 소요됐다. 시간은 예상대로 더디게 아주 게으르게 흘렀다. 그러다 문뜩, 현지 시각과 한국 시각을 계속 비교하며 신경 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시간이면 자지 않고 깨어 있는 게 시차 적응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던 것 같다. 잠시 생각하다 여행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시차 걱정 너무 신경 쓰지 말기. 지금 오늘 이 시간에 집중하자. 그때 피곤한 건 그때의 일이다.' 이렇게 적고 나니 한 결 마음이 편해졌다. 한국 도착 후 바로 다음날의 출근을 왜 미리 비행기 안에서 걱정했을까.




오랜 비행 끝에 드디어 유럽 땅을 밟았다. 도착한 곳은 독일 그리고 선선한 가을이었다. 피곤한 몸을 깨우기에 티 없이 맑은 찬 공기가 우리를 맞이했다. 도착한 첫째 날은 독일의 한 마을에 위치한 호텔로 바로 이동했다. 잠이 오지 않아 겨우 잠을 청했다. 가이드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현지 시각 새벽 4시에 눈이 떠졌다. 밖은 어두컴컴했지만 컨디션은 밝았다. 오늘 어떤 새로운 하루를 보내게 될지 기대됐다. 여행하는 자만의 기쁨을 사뿐히 누렸다.


그렇게 본격적인 여행날의 아침이 밝았다.





2024.10. 26 ~ 11. 03

독일, 체코, 헝가리, 그리고 오스트리아



오래 걸린 만큼 이번 여행은 특별했음 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오길, '기록이 있는 여행'이 되길 바랐다. 무계획과 약간의 기대감을 안고 떠난 여행이 성공적이길 바랐다. 결론적으로, 가볍게 떠나서 오히려 많은 것들을 담아 올 수 있었다. 관광과 여행 그 사이를 넘나들며 하루하루를 채웠다. 패키지여행이었지만 자유를 찾아 틈틈이 사색하고 또 기록했다.



그곳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읽고, 썼던 것을 글로 써보려고 한다. 단편 영화를 제작하듯, 글로 채워가며 여행을 비로소 완성시켜보고 싶다. 여행 기간 가이드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오른다. "여행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가는 게 아닐까요."



8일간의 여정을, '이토록 모범적인 여행'의 이야기를 꺼내보려 한다. 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모험을 떠나는 시작이 되길 혹은 행복했던 기억을 되살려 주는 이야기로 읽히기 바란다.


여행은 육체적인 경험으로 시작할지 몰라도, 우리를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만드는 내면의 여행이 동반되어야만 비로소 여행이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선물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책 《나를 채우는 여행의 기술》 내용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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