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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도 눈사람은 만들고 싶어

눈사람을 만들며 든 생각

by 미리


오늘은 유난히 눈이 많이 왔던 하루였다.


출근 전, 창 밖을 내다봤는 데 온 사방이 새하얗고, 하늘에서는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괜히 창문도 한 번 열어봤다. 이른 아침부터 눈사람을 만들러 나온 아이들이 보였다. 잠시 새하얀 배경을 보고 감성에 젖을 뻔했지만, 출근을 해야 했다.


출근길에서도 쌓인 눈을 보며 지방에 이렇게 많은 눈이 온 게 몇 년만일까 하며 생각에 잠겼다. 산도, 거리도 그리고 주차된 차도 눈으로 덮여 있었다. 직장 동료의 남편 분 차를 얻어 타고 편하게 출근해서 그런지, 부담 없이 감성에 젖어들었다.




뭔가 오늘 같은 날은 눈사람을 한 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는 그냥 나가서 만들면 됐지만, 지금은 일을 해야 하니깐 '눈사람 만들기'는 '굳이?' 또는 '시간이 없다'는 말 앞에 만들려고 하기도 전에 바로 녹아버렸다.


오늘따라 '하고 싶다'는 감정을 무시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출근도 무사히 했겠다, 영업 시작 시간까지 30분 정도 남았으니 눈사람을 만들 결심을 해도 괜찮았다. 그렇게 출근과 동시에 패딩을 입은 채 막내 동료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손바닥만 한 눈덩이를 만들고, 계속 굴렸더니 크기가 점점 커졌다. 당연히 아는 사실인데도 커져가는 눈덩이를 보고는 신기해했다. 눈을 굴리고 있는 상황이, 눈덩이는 정직하게 커지고 있는 상황이 그저 재밌었다. 손은 시려 오는 데 추운 줄 모르고 할 일?을 계속했다. 꼭 완성해야지 하는 숙제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다시 일하러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있어서였겠지만, 그럼에도 완성될 눈사람만 생각하며 즐기려고 애썼다.


서로 한 덩어리씩 만들어서 합쳤더니 대강 눈사람 형태가 만들어졌다. 이렇게만 만들 거면 애초에 시작을 안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이리저리 꾸밀 재료도 찾아보았다. 그렇게 여차여차 눈사람은 눈, 코, 입, 그리고 팔이 생겼다.





급하게 탄생해야 했던 눈사람 치고는 제법 형태가 갖춰졌다. 더 만족스럽게 만들고 싶어도 그럴 수 없으니 만족하고 발길을 옮겼다. 아주 잠시의 일탈이었지만, 눈처럼 순수한 시간을 보냈다.




영업이 시작되고, 눈이 내려서 그런 지 내점 하는 손님이 적었다. 따뜻한 카페라테를 마시면서 몸을 녹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랜만에 느낀 그 감각이, 그리고 앉아서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 묘하게 다가왔다. '어른'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고작 눈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마음먹어야만 만들 수 있다는 상황이, 어쩌면 앞으로는 눈을 보고도 '눈사람 만들고 싶다는' 감정이 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이가 점점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몇 년 만에 쌓인 눈을 보고, 오늘이 아니면 언제 또 이 순간을 즐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음에 괜스레 안도했다. 항상 해맑게 살아가고 싶은 인생의 모토가 있다. 직장인이 된 후 조금은 달라지긴 했지만, 오늘 하루만은 앞으로도 쭉 해맑게 살고 싶은 그 마음을 용케 지켜냈다. 고작 10분이었지만, 그 10분으로 여러 감정을 느꼈다.




일 하는 중간중간 창 밖을 내다봤다. 아직까지는 눈사람이 형태를 지키고 있었다. 혼자 우두커니 있는 눈사람이 아련해 보이면서도 귀여웠다.


놀이터가 아니라, 일터에서 탄생한 눈사람.



눈이 그치고 비가 내렸다. 큰 비는 아니었지만 눈사람에게는 치명적일 비. 예상된 결말이지만, 퇴근길에 눈사람이 있던 자리에 다시 가보았는 데 눈사람은 온데간데없었다. '오늘 하루치의 눈사람'은 그렇게 그냥 눈이 돼버렸다... 그래도 덕분에 오늘 하루가, 오늘의 날씨가 추억이 됐다.








오늘처럼 살아가고 싶어졌다. '하고 싶다'는 감정을 무시하지 않고, 순간을 즐길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어른이 된다는 게 많은 걸 포기해야 할 테지만, 그럼에도 '순수함'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고, 해맑게 인생을 살아가고 싶다. 고작 눈사람을 만든 것뿐이었지만, 인생을 돌아봤다.




집에 들어가는 길, 꽃집 가게 앞에 큰 눈사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침 퇴근하시던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너무 잘 만드셨다고 말씀드렸더니 기분 좋은 미소를 보내주셨다. '어른도 눈사람은 만들고 싶어' 글의 제목만 퇴근 전에 정해놓고 출발했었는데, 그에 마침 딱 맞는 상황을 마주했다.






어른도 눈사람을 만들고 싶어 해도 된다. 어른도 당연히 눈사람을 만들어도 된다. 어른이어도 하고 싶은 걸 해도 된다. 눈은 매일 오는 게 아니니깐.



오늘치의 눈사람이 오늘 하루를 또 버티게 해 주었다. 가볍게 든 생각을 짧게나마 적어보았다. 만족스러운 글은 아니지만 오늘의 감정에 충실했던 것만으로 만족해 보려 한다. 누군가에게는 공감으로 다가가길 바라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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