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 앞에는 늘 ‘AI 전문가’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새로운 기술을 남들보다 먼저 접하고, 그것으로 세상에 없던 서비스를 만드는 일은 즐거웠다. 매일매일 지적인 자극으로 가득했다. 팀장이 되고, 기술을 사업으로 연결시키면서 나의 역할은 점점 중요해졌다. 노력한 만큼 인정받았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보다는 기대감이 더 컸다.
하지만 회사는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서,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대규모 조직 개편이 발표되었고, 나는 그 거대한 흐름에 휩쓸렸다. 나의 새 자리는 SI 조직의 교육 담당자였다. 지난 7년간의 경력과는 어떤 연결고리도 찾을 수 없는, 완전히 낯선 이름이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리셋된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내 전문성과 경험은 이곳에서 아무 소용이 없는 듯했다.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할 방법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 그 생각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존심에 상처가 났고, 마음은 조급해졌다.
하지만 6개월쯤 지나자,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여러 부서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업무를 지원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이 회사가 어떤 부품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부품들이 어떻게 맞물려 하나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 책상 앞에서만 보던 좁은 시야가 넓어지는 경험이었다.
마침 회사 전체의 화두는 ‘AI 역량 강화’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막연한 주제였지만, 나에게는 가장 익숙한 분야였다. 나는 누구보다 그 교육의 필요성과 내용을 잘 알았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지도 고민했다. 그래서 지루한 공지 메일 대신, AI로 만든 짧은 웹툰을 배포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낯선 곳에서도 나의 쓰임은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중요한 것은 소속이 아니라 내가 하려는 의지였다. 역할은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정의하고 넓혀갈 수도 있는 것이었다. 직업에 귀천이 없듯, 조직 안의 자리에도 쓸모없는 자리는 없다. 어떤 환경에서든 배우고 성장할 기회는 있다. 나는 지금 그 평범한 진리를, 조금 아픈 방식으로 온몸으로 배우고 있다.